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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협약(日露協約)과 러시아 세력의 성쇠(盛衰)
  • 제1차 일러의정서(日露議定書)

제1차 일러의정서(日露議定書)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과 러시아 간의 협정을 도모하여,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 29년 5월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자 후작(侯爵)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가 특파대사(特派大使)로서 거기에 참석하였고, 그 기회에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와 모스크바에서 만나 협상을 벌여, 6월 9일에 조선 문제에 관한 의정(議定)을 이루었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이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과 러시아 양국 정부는 조선의 재정(財政)에 관한 충언(忠言) 또는 원조를 제공할 것.

2. 조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군대 및 경찰을 창설하고 유지하게 할 것.

3. 일본은 현재 점유하고 있는 전신선(電信線)을 계속 관리하고, 러시아는 경성으로부터 그 국경에 이르는 전선 가설권을 보유한다.

4. 훗날 양국 간에 앞에 기록한 사항 또는 그 사항에 관한 상의가 필요할 때는 우호적으로 타협할 것.

그리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청나라는 이홍장(李鴻章), 조선은 민영환(閔泳煥)을 대사로 참여하게 하고, 동아시아 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여러 가지 조약들을 체결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였지만, 청·한 양국은 오히려 훗날 외교적으로 심한 곤경에 빠졌다.

그런데 러시아는 위와 같이 일본과 협약을 체결한 것과 무관하게 두루 자국 세력의 확장에 전념하여, 철도, 산림, 광산의 이권을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래 조선 군대 훈련의 임무를 맡은 일본 사관(史官)을 해임하였으며, 일본식 군제(軍制)를 폐지하고 러시아 사관들을 육군 교관으로 초빙하여 채용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30년 7월에 다시 다수의 사관 및 하사관들을 경성으로 보내 조선 정부에게 그들을 채용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앞서 국왕은 고무라·베베르 각서의 결과에 따라 메이지 30년 【광무 원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같은 해 9월에 베베르 공사는 멕시코 주재 공사로 전임하고, 스페이에르 【Speyer, 사패야(士貝耶)】 가 그의 후임으로 경성에 오자, 러시아는 한층 강경한 방침으로 한국과의 관계에 임하였으며, 나아가 그 재정상의 권리도 함께 거두어들였다. 아직 임기가 끝나지 않은 총세무사(總稅務司) 영국인 브라운 【Brown, 백탁안(柏卓安)】을 해직하고 러시아인 알렉세예프 【Alexeieff, 알력섭(戞櫟燮)】 를 그에 대신하도록 강요하자, 한국 조정은 11월에 결국 알렉세예프를 채용하여 도지부(度支部) 총고문관(總顧問官) 겸 해관총판(海關總辨)으로 삼았다. 이에 경성 주재 영국 영사 조르단 【Geordan, 주이전(朱邇典)】 은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영국 동양함대는 인천에 와서 위력시위를 벌였으므로, 한국 조정은 깜짝 놀라 브라운에게 관직을 내려 여전히 재정의 최고고문이 되게 하였다. 이렇게 방약무인한 러시아의 행동은 완전히 일·러 협상의 정신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의 세력과 충돌하고, 또한 미국의 동정(同情)도 잃었으며, 한국 내에서 반(反)러시아파 세력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31년 3월에 러시아에서 온 재무고문과 육군교관 등은 모두 해직되고 경성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미리 러시아가 기획한 절영도(絶影島)의 조차(租借)도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4월 경】 이에 앞서, 김홍륙(金鴻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함경도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를 잘해 국왕과 러시아 사신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리하여 국왕에게 크게 총애를 받았으며 귀족원경(貴族院卿) 및 한성부윤(漢城府尹)의 요직을 받아 매우 위복(威福)을 누렸다. 그러나 메이지 31년에 러시아당의 세력이 갑자기 꺾이자, 그에게도 역시 통역사의 오류가 있었다고 하여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다. 【8월】 때마침 국왕과 황태자에게 독(毒)을 섞은 홍차(紅茶)를 바쳐 시해하려고 한 사건이 폭로되자, 그에 관련된 자로서 처형되었다. 【10월】 또 전 군부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는 사람을 모아 입궐하여 국왕을 겁박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등의 사건들이 있었다. 【8월】 이러한 일들로 미루어 당시의 정세를 미루어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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