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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세력의 확장과 마산(馬山) 조차 사건

메이지 31년 1월에 독일은 청나라로부터 교주만(膠州灣)을 조차(租借)하고, 같은 해 4월에 영국은 위해위(威海衛)를, 프랑스는 광주만(廣州灣)을 조차하였다. 바로 이때 러시아는 조선에서 세력을 잃음과 동시에 주력을 만주 방면의 지배로 돌려, 31년 3월에 청나라로부터 여순(旅順) 및 대련(大連)을 조차하여 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의 해상(海上) 연락은 중요한 문제가 되어, 조선 반도에 중계소를 구할 필요를 느꼈다. 이것이 예전에 절영도(絶影島)의 조차를 조선 정부와 교섭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형세 하에서 러시아 공사 마튜닌은 경성을 떠나고, 파블로프 【Pavloff, 파우노후(巴禹路厚)】 가 메이지 32년 1월에 그의 후임으로 와서, 예전에 두세 차례 일러 의정서가 체결된 것에 관계없이, 러시아의 세력을 심는 데 힘썼다. 32년 3월에는 고래 어업의 기지를 한국 연안에서 획득하고,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울릉도 벌목권(伐木權)을 얻겠다는 뜻을 일본에 통지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 만주에 관동성(關東省)을 두고, 알렉세예프를 총독(總督)에 임명하여, 태평양함대를 통할하게 하는 등 차례로 야심의 손길을 뻗쳤다. 같은 해 10월에 함선(艦船) 정박지(碇泊地)로서 목포(木浦) 부근의 고하도(孤下島)를 조차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메이지 32년 5월경부터 마산(馬山) 부근의 땅을 조차하여 군사상의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움직였다. 마산은 30년 1월에 개항한 남부 조선의 요지로서, 러시아가 이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일본과 조선 등에 대해 적지 않은 위협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그것을 간과할 수 없어 한국 정부에 권고함과 동시에 그 대항책을 강구하였으므로, 러시아는 결국 그것이 과도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율구미(栗九味) 【마산의 남쪽 약 1리 지점】 땅을 빌려 전관(專管) 거류지(居留地)로 삼고, 석탄 저장소 및 해군 병원을 두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러시아의 동아시아에 대한 야심은 타올라 일·러의 총돌은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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