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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의 개전(開戰)

메이지(明治) 32년 【광무(光武) 3년, 이 태왕(李太王) 36년】 에 청나라 내에서 폭도들이 봉기하였는데 청나라 정부는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 관병(官兵)들도 역시 폭도에 가담하여, 북경(北京)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을 공격하여 포위하고, 일본 공사관원들 및 독일 공사는 불행히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각국이 파견한 군대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일본군을 중심으로 북경으로 향하여, 마침내 폭도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하고 점차 각국 공사관을 구원하였다. 이 사변을 맞이하여 만주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사들도 역시 폭동을 기도하여 그곳에 있는 러시아인들을 습격하였다. 러시아는 곧 이 기회에 편승하여 대병력을 보내 만주의 요소(要所)들을 점령하였다. 대략 사변이 진정되었지만 러시아는 그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조선으로 들여보내 용암포(龍岩浦) 【압록강 하구】 및 그 부근을 점령하고, 더욱 야심을 드러냈다. 【메이지 36년 4월, 광무 7년】 그러나 만약 러시아가 만주를 병탄하면 한국은 끊임없이 그들의 압박을 받을 것이고 일본도 역시 그 피해를 대단히 크게 입게 되어,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없었다. 일본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평화의 수단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여러 차례 러시아와 교섭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약 반 년이 걸렸지만, 러시아는 조금도 성의로써 받아들이지 않았고 회답을 미루었다. 그 사이에 러시아는 점차 육군과 해군의 군비를 정비하여 무력으로써 우리를 위압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다시 담판을 계속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메이지 37년 2월 【6일】 에 어쩔 수 없이 국교를 단절할 것을 그들에게 통지하였다. 국교가 한번 파기되자 일본군은 곧바로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그중 한 함대는 곧장 여순(旅順)을 습격하였고 【8일】 다른 한 함대는 러시아 군함 2척과 인천 앞바다에서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다 【두 군함 모두 인천항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폭침하였다. 9일】 이리하여 세계에서 일찍이 없었다고 하는 일·러의 전쟁이 비로소 그 시작을 알렸다. 이때가 메이지 37년 【광무 8년, 이 태왕 41년】 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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