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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旅順) 포격과 인천 앞바다 해전(海戰)

일·러 전쟁의 서막은 해전(海戰)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러시아국 태평양함대는 그 주력을 여순구(旅順口)에 두고, 해군 중장 스타르크가 함대를 이끌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쾌속력(快速力)의 순양함(巡洋艦) 4척과 수뢰정(水雷艇) 10여 척이 있었다. 또 인천항에는 순양함 와리야크, 포함(砲艦) 코레츠 등 2척이 정박하였다. 우리 해군의 주력은 3개의 함대로 이루어졌으며, 7개의 전대(戰隊)로 나뉘었다. 해군 중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은 제1함대, 【제1전대, 제3전대】 해군 중장 카미무라 히코노죠(上村彦之丞)는 제2함대, 【제2전대, 제4전대】 해군 중장 가다오카 시치로(片岡七郞)는 제3함대 【제5전대, 제6전대, 제7전대】 의 사령장관(司令長官)의 보직을 맡았다. 그리고 제1함대와 제2함대는 사세보(佐世保) 군항에 집합하고, 제3함대 【치요다(千代田)를 제외하고】 는 다케시쿄(竹敷要)항 및 오군(吳軍)항에 정박하여, 출동 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렸으며, 따로 순양함 치요다는 인천항에 있으면서 경비의 임무를 맡았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중장은 기함(旗艦) 미카사(三笠)호에 탑승하여, 국교 단절 다음날인 6일에 인천항 및 여순구의 적함대를 격파하였으며 또한 인천항에 육군을 상륙시킬 목적으로 사세보를 출항하였다. 전라남도 서남쪽 해각(海角)에 이르렀을 무렵에, 도고 중장은 제4전대 【아사마(淺間), 나니와(浪速), 니타카(新高), 쓰시마(對馬), 다카치호(高千穗), 스마(須磨), 아카시(明石) 등 7척 외에 수뢰정(水雷艇) 2척】 의 사령관 해군 소장 우류 소토키치(瓜生外吉)에게 명하여 인천항으로 향하게 하였다. 제4전대가 호위하는 3척의 운송선(運送船)에는 보병 제12여단장 육군 소장 키고시 야스츠나(木越安綱)가 인솔하는 육군 약 1개 여단을 가득 태웠다. 우류 소장은 8일 오전 8시 반에 베카도 【충청남도 아산만 풍도(豐島)의 서남쪽】 앞바다에서 남쪽으로 항해 중이던 치요다와 만났는데, 러시아 함선 2척이 아직 인천항에 정박해 있다는 것을 알고, 오후 4시 20분에 나니와, 니타카, 아카시 등 여러 전함들을 팔미도(八尾島) 【인천항 밖】 부근에 정지하여 항구 바깥을 경계하게 하였다. 이때 러시아 전함 코레츠는 출항하여 우리 수뢰정을 사격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로 돌아갔다. 한편 우리 운송선은 곧장 인천항에 정박하여, 해군의 엄호하에 그날 밤에 육군의 상륙을 완료하고, 이튿날인 9일 오전 6시에 본국을 향해 출범하였다. 9일 오전 7시에 우류 소장은 한 통의 봉서(封書)를 인천 주재 러시아 영사관(領事館)을 통해 와리야크호 함장인 루드니에프에게 보내, “오늘 오후 4시까지 인천항을 떠나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항구 안에 포격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또한 정박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군함 및 상선에게도 러시아 군함이 만약 출항하지 않을 때는 위험이 닥칠 것이니 오후 4시까지는 정박지를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다. 오후 0시 10분에 2척의 러시아 군함이 출항하여 팔미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우리의 아사마호는 적군함이 약 7천 미터까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포격을 개시하자 여러 군함들도 그를 따랐으며 적도 역시 곧바로 응전하였다. 교전한 지 45분 후에 와리야크호는 키가 잘리고 함교(艦橋)가 파손되어 눈에 띄게 좌현(左舷)으로 기울고 배의 복부를 관통당하여 함께 항구 안으로 달아났다. 우리 함대는 깊숙이 추격하지 않고 바깥 바다로 나와 경계의 임무를 맡았다. 오후 4시 20분에 러시아 군함 2척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상선(商船) 숭가리호와 함께 스스로 항구 내에서 폭침(爆枕)의 최후를 마쳤다.

당시 인천과 경성에 거류하고 있던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은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이 급박하다는 것을 전해 들었으며, 또한 한국 조정의 상하 관료들의 거취를 알 수 없었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여 안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천항 앞바다 해전이 대승을 거둔 날 키고시 여단이 경성에 입성하자, 인심은 갑자기 진정되고 한국 조정은 점차 우리나라[일본]를 신뢰하였다.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형세가 나날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경성을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12일에 하야시(林) 공사의 알선에 따라 우리 군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철도로 인천항을 나와 프랑스 군함 파스칼호에 탑승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므로, 한국 관민(官民)들의 향배(向背)는 비로소 정해졌다. 전쟁 시작 벽두에 우리 육군과 해군의 이처럼 기민한 행동이 전쟁 국면 전체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여순구(旅順口)로 향하던 도고(東鄕) 사령장관은 2월 8일 밤에 구축함대를 풀어 적 함대를 습격하게 하여, 레트비잔, 체사레비치, 팔라다 등 3척의 군함에 커다란 손해를 입혔다. 다음날 정오에 우리 연합 함대는 초조해진 적군에게 싸움을 걸자, 적은 육지 포대(砲臺)의 엄호 하에 응전한 지 약 1시간 후에 항구 안으로 숨었으며, 이후 깊숙이 칩거하여 오로지 손상된 함정을 수리하는 데 급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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