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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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3.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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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 37〜38년의 전쟁
  • 압록강 전투

압록강 전투

전쟁 개시와 함께 한국 서북부에서 활동하고, 이어서 제1선(線)으로 만주에 침입할 제1군은 육군 대장 구라키 다메모토(黑木爲楨)를 사령관으로 하여, 근위사단(近衛師團), 【사단장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제2사단, 【사단장 육군 중장 니시 칸지로(西寬二郞)】 제12사단 【선발대로서 한국에 건너갔다.】 및 병참감부(兵站監部) 등이 차례로 우지나(宇品)항에서 승선하여, 진남포(鎭南浦) 【평안남도】 를 향해 수송을 시작하여, 3월 29일에는 모두 완결하였다. 구라키 사령관은 상륙 이후 오로지 적의 동정을 정찰하고, 도로의 수리와 건설, 군용 다리와 군용 전선의 가설 등에 힘썼다. 더불어 전군(全軍)으로 하여금 점차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하여, 가는 곳마다 적의 소부대들을 몰아내면서 의주(義州) 부근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압록강을 사이에 둔 의주의 건너편 연안에서는 적의 보병 약 1만 3천 명, 기병 5천 명, 포(砲) 60문이 우리 군에 대비하였다. 군사령관은 먼저 압록강 안에 있는 구리도(九里島), 어적도(於赤島), 검정도(黔定島) 등을 점령하여, 적의 전초(前哨)를 물리치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오로지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4월 25일 밤에 우리 공병대(工兵隊)는 맹렬한 사격을 퍼부으면서 구리도 서북쪽 및 그보다 약간 하류의 두 곳에 적 전방 가교(架橋)를 감행하여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전군은 이튿날인 5월 1일에 포병의 엄호사격 하에 모두 강을 건너, 곧바로 적진(敵陣)을 압박하자, 적은 구련성(九連城)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수구진(水口鎭)의 동북쪽으로부터 하류 멀리에 있는 안동현(安東縣)의 서남쪽에 걸친 전선을 형성하여, 진지를 쌓고 참호를 파서 목숨을 걸고 싸웠으므로, 전투가 극도로 격렬하여 양쪽 군대의 사상자가 대단히 많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적이 패퇴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우리 병사들은 힘을 얻어 돌격하여 마침내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더 나아가 북쪽으로 추격하여 합마탑(蛤蟆塔)에서 거의 그 주력(主力)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적은 전사자 614명, 부상자 1144명, 포로 613명을 낳았고, 따로 속사야포(速射野砲) 21문, 소총 1천여 정 등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 군대의 사상자는 932명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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