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3.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 비고(備考)
  • 메이지 37〜38년의 전쟁
  • 여순(旅順)의 개성(開城)

여순(旅順)의 개성(開城)

여순구의 요새는 러시아가 천연의 험준함에 의거하여, 몇 년의 세월과 수억의 군사비를 투여한 곳으로, 그 건설이 견고하고 무기가 뛰어난, 참으로 난공불락의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불릴 만하였다. 그러므로 포위의 임무를 맡은 제3군의 악전고투는 짐작할 만하였다.

노기(乃木)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은 제1, 제9, 제11 등 3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각 부대가 역할 분담에 착수함과 함께, 7월 25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대고산(大孤山)과 소고산(小孤山)의 견고한 요새를 함락시키고, 8월 8일에 다시 적을 본방어선(本防禦線) 안쪽으로 격퇴시켜, 포위의 형세가 완전히 갖추어졌다. 8월 11일에 참모총장 원수(元帥)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천황 폐하가 “여순구 총공격에 앞서 성 안에 머물고 있는 비전투원들의 피난을 허락해 주었다.”라는 참으로 인자한 성지(聖旨)를 노기 사령관에게 전하였다. 사령관은 이에 같은 달 16일에 군사(軍使)를 적의 사령관 스텟세르에게 보내 성지를 알렸으며, 또한 항복을 권하는 문서를 교부하자, 다음날 적은 우리의 제의를 거절해 왔다. 이리하여 우리 군대는 8월 19일에 제1차 총공격에 나서, 강력한 습격을 가해 반룡산(盤龍山) 이하 두 진지를 빼앗았다. 이리하여 정공법(正攻法)의 준비를 갖추고, 갱도(坑道)의 굴착이 성공하였으므로, 9월 19일에 제2차 총공격을 가하여, 203고지 【이령산(爾靈山)】 를 점령하였다. 이곳은 여순구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항구 안쪽을 내려다보고 적의 급소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커다란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여러 차례 역습을 시도하여, 점차 이곳을 탈환하였다. 우리 공위군(攻圍軍)은 제7사단의 정예부대가 새로 가담하였으므로, 10월 26일에 제3차, 11월 26일에 제4차 총공격을 가하여, 여러 차례 격전을 거듭하는 동안 처참함이 극에 달하였지만 12월 6일에 마침내 제1의 목표인 203고지를 확실히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전쟁 국면은 급속히 진척되어, 항구 안의 바를라더, 베레스웨트, 포페다 이하 여러 전함들은 우리 해군 중포대(重砲隊)에게 격침되었으며,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전멸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12월 15일 이후 우리 군대는 적의 본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들인 계관산(鷄冠山), 이룡산(二龍山), 송수산(松樹山) 등의 여러 포대(砲臺)들을 함락시키고, 이번에는 단숨에 여순 시가지로 쳐들어가려고 할 때, 적장(敵將) 스텟세르는 힘이 달리자 38년 1월 1일에 우리 군대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군의 위원들은 해군 진영에서 러시아측 위원들을 만나, 개성(開城)과 항복의 규약을 논의하고, 같은 달 13일에 요새(要塞) 이하 관유물(官有物) 전부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약 반 년에 걸친 포위전(包圍戰)은 종결을 고하였다.

여순구의 성문이 열리자 우리 군의 제1기 작전계획은 대략 완료되었다. 제2기는 따스한 봄을 기다렸다가 적의 주력을 분쇄하고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38년의 새해와 함께 적군 총수(總帥)인 크로바트킨은 열세를 만회하려고, 용맹한 장수인 미스첸코에게 기병단(騎兵團)을 주어 우장(牛莊)에서 기습하게 하였으며, 또한 흑구대(黑溝臺)에서 대규모 습격을 가하려고 하였지만, 모두 격퇴되어 실패로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군대는 봉천(奉天) 부근에서 러시아 군대와 사상 초유의 대회전(大會戰)을 벌여, 육전(陸戰)의 결정적 승리를 얻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