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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奉天) 부근의 회전(會戰)

오야마 총사령관은 구로(歐露) 제4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육군대장 가와무라 카게아키(川村景明)에게 명하여 압록강군을 이끌고, 북부 한국으로부터 만주로 진출하여, 우리 군대의 가장 우측 날개로 펼쳐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크로파트킨은 이것을 알아채고, 우측 날개의 일부와 예비대(豫備隊)를 나누어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새로 여순구에서 온 제3군은 빈약한 적의 가장 오른쪽 날개를 우회하여 그 배후를 가격하였으므로, 적군은 크게 낭패를 당하여, 주력(主力)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전체 군대는 적의 동요에 편승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제2군과 제3군은 점차 적의 우측 날개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제1군과 제4군은 중앙에서 맹렬하게 적의 정면을 돌격하여, 기회를 보아 봉천의 동북쪽으로 나아가, 제3군과 함께 퇴로를 막았으므로, 적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흩어지고, 크로파트킨은 가까스로 몸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겨우 패잔병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실로 3월 16일의 일이다. 우리 군대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추격전을 계속하여, 철령(鐵嶺), 개원(開原), 창도(昌圖)를 점령하였으며, 선봉은 멀리 장춘(長春)에 도달하였다.

이 대전투의 서막(序幕)인 압록강군의 활동은 2월 중순에 있었으며, 적군과 아군의 총 병력은 85만 명, 포(砲) 2천 5백 문, 전선(戰線)의 총 연장은 50리(里)를 넘었으며, 3월 1일 이래 10일 밤낮을 끊임없이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우리 군대의 사상자는 약 5만 명을 웃돌았지만 러시아군은 16〜17만 명의 전투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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