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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장 조국(肇國)의 유구
  • 1. 고조선

1. 고조선

【단군의 개국. 조국 기원을 국기(國紀)라 약칭함】 『전조선(前朝鮮)』 대동강 유역은 가장 일찍이 목축과 농사가 일어난 곳이니 단군왕검께서 평양(왕검성)을 중심으로 맨 처음에 나라의 터를 닦으셨다.(국기 원년은 서기전 2333년) 옛 글을 상고하면 처음에 환웅 천왕께서 하늘로부터 태백산에 내려와서 신시를 베풀고 이 세상을 보살피시며 단군을 낳으시고 단군께서 다시 평양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신정(神政)을 행하셨다 하였다. 이로부터 신정 시절이 약 천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으니 이를 가르쳐 전조선이라 하는 것이다.

『후조선(後朝鮮)』 전조선의 신정이 오랫동안 행하는 사이에 산업도 차차 열리고 백성의 지혜도 점점 깨쳐지게 되자 새로운 국가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가르쳐 후조선이라 하는데 이도 역시 왕검성을 서울로 하여서 있었던 것으로서, 그 지역은 대개 반도의 북부와 만주의 남부 일대에 걸쳐 있어 고조선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찍이 열린 곳이었다.

【8조의 금법】 그리하여 약 천 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문화와 산업이 자못 발달하여 민간에는 8조의 금법을 행하였으며 정직과 예의를 귀히 여기고 평화와 결백을 좋아하며 아낙네는 믿음직스러워 몸 가지기를 깨끗이 하였다. 그리고 농사와 양잠과 길쌈이 많이 열렸으며 장사[교역]도 이미 시작되었고 그릇과 연장도 또한 볼만한 것이 있었다.

후조선은 그 말기에 이르러 연나라와 다투어 서쪽 땅[요동과 요서]을 잃은 뒤로 나라의 형세가 자못 쇠약하더니 준왕 때에 일찍이 귀화하여 서부 국경 땅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던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국기 2140년, 서기전 194년)

【부여와 진】 후조선을 가운데 두고 남쪽과 북쪽에는 부여와 진국 등이 아울러 서 있었다. 부여는 부여 부족이 세운 나라로서 동만 일대에 서 있었으며, 진나라는 한(韓) 부족이 세운 것으로서 한강 유역으로부터 남부에 걸쳐 있었다.

위만이 또한 왕검성을 서울로 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을 위만 조선이라 한다. 위만은 이웃한 진번(황해도의 대부분), 임둔(강원도의 북부와 함경남도의 일부) 등 여러 작은 나라를 굴복시켜 세력이 자못 강성하더니 그의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 한나라(무제)와 충돌하여 마침내 망하였다.(국기 2226년, 서기전 108년)

 【부록】 『한나라의 4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의 땅을 빼앗아 그곳에『낙랑』(평안남도 및 황해도의 북단), 진번(황해도의 대부분), 임둔(강원도의 북부와 함경남도의 일부), 현토(처음에는 압록강 유역의 통구가 중심임) 등 4군을 두었으나 우리 원주민의 항쟁이 매우 굳세었으므로 겨우 이십여 년 뒤에 군의 폐합을 행하였다. 임둔과 진번의 2군을 폐하고 임둔 땅에 동부도위, 진번 땅에 남부도위를 두어 낙랑군에 합치고, 현토군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방면을 거쳐 다시 봉천(奉天) 근처로 옮겼다가 마침내 고구려에게 망하였으며 낙랑군은 약 4백여 년 동안 평양 일대에서 명맥을 보존하다가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도 얼마 후에 없어졌음) 고구려 미천왕 때에 멸망되고 말았다. 이 낙랑(평양 일대)을 중심으로 토착 문화와 한(漢) 문화가 교류하여 이른바 낙랑 문화(낙랑 유적)가 발달하였으며, 이 문화가 우리 남북 여러 나라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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