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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고려의 흥기와 후삼국의 통일

2. 고려의 흥기와 후삼국의 통일

태봉의 왕 궁예는 말년에 이르러 마음이 교만해지고 또 불교를 혹신하여 정사를 보살피지 아니하여 이에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또 사람을 의심하고 시기함이 점점 심하여 부하들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참혹하게 죽였으므로 인심은 매우 어수선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건의 혁명이 일어났으니 본래 왕건은 송악(개성)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궁예를 섬겨 많은 공훈을 세웠으며 견훤의 해상 세력을 꺾기 위한 광주와 진도의 경략도 실상은 왕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왕건은 이와 같이 많은 공을 세웠으며 도량과 지략이 또한 뛰어났으므로 그의 세력은 점점 굳어지고 인망이 또한 높았다. 그런데 한편 궁예의 난폭함은 날로 심해가며 왕건의 부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이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세웠다.(국기 3251년, 서기 918년)

왕건은 그의 국호를 고려라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겨 궁예가 다스리던 땅을 그대로 차지해 가지고 새로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으니 이가 바로 곧 고려 태조다. 당시 신라는 날로 무너지고 있으므로 고려의 적은 후백제였다. 그러므로 왕건은 신라에 대해서는 자멸하기를 기다리고 후백제에 대해서는 전력을 기울여 천하를 다투었다.

당시 후백제 견훤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여 북으로 왕건과 싸우면서 동으로 신라를 쳐서 한때에는 경주까지 침입하여 신라왕의 폐위를 행한 일도 있었다. 반면 왕건은 신라를 어루만져 자기에게 의지하게 하고 후백제에 대해서는 굳세게 싸우면서 국면 전환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동안에 후백제에서는 왕위 다툼으로 견훤의 부자 사이에는 내홍이 일어나 장자 신검에게 유폐를 당한 견훤은 마침내 왕건에게로 달아나왔다. 이에 판국은 급히 회전되어 왕건의 세력이 더욱 떨치게 되자 지금까지 명맥만 보존하고 있던 신라의 경순왕은 자립의 신념조차 잃은 나머지 천년의 사직을 들어 왕건에게 바치고 말았다.(국기 3268년, 서기 935년, 신라는 56대 992년을 지내었음) 왕건은 그 이듬해에 신검을 쳐 후백제를 평정하고 잠깐 동안 벌어져 있던 후삼국을 통일하여 삼국 통일의 전날 상태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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