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 국사교본
  • 제2편 중고(신라 통일기-고려)
  • 중고의 후기(고려조)
  • 제2장 고려 중기의 융성
  • 2. 거란 격퇴와 여진 정벌

2. 거란 격퇴와 여진 정벌

(가) 『거란 격퇴』 고려와 거란과의 교섭은 이미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태조는 거란이 아무런 까닭 없이 발해를 쳐서 멸한 것을 보고『무도한 나라』라 하여 거란이 2, 3차 화친을 청하는데도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국 사이에 얼마동안 별 교섭이 없더니 뒤에 거란이 압록강 동남 기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을 정복한 뒤 갑자기 고려에 싸움을 걸었다.

성종 12년(국기 3326년, 서기 993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대거 쳐들어와 서북변의 땅을 침노하였다. 그 침입한 원인은 영토 문제도 있지만 주로 고려가 송나라와 연락하여 그들을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자못 낭패하여 땅을 베여주고 화친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중군사 서희가 이를 반대하며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거란의 진중에 들어가 침입의 이유를 물었다. 소손녕은 짐짓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옛 강토는 우리의 소유일 것이다』하며 우리 서북 지방을 토색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희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으므로 국호도 고려라 한 것이니 만일 강토를 의논한다면 귀국의 동경(요양)도 우리의 경내에 있는 것이다』하고 경위를 따져 타일렀다. 그리하여 화의가 드디어 성립되어 압록 동쪽의 지역은 고려의 소속으로 인정하게 되는 대신에 고려는 요(거란)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이것이 거란의 제1차 침입으로서 그들은 별 소득이 없이 돌아갔다.

고려는 그 뒤에도 친송책을 써서 세력의 균형을 안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거란은 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마침 고려는 성종이 붕어하고 목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태후 황보씨와 외척 김치양 등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므로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정계를 깨끗이 하고자 김치양 등을 제거하고 목종까지 폐하여 죽인 다음에 현종을 세웠다. 이 틈을 타 거란의 성종은 40만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거란군이 도성으로 들어오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고 개성은 마침내 적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때에 개성은 병화로 궁궐, 부고, 민가가 많이 소실되었으니 우리의 고적과 옛 기록이 많이 없어진 것도 이때의 일이다. 적은 잠깐 동안 빈 도성에 머물러 보았으나 별 도리가 없는지라 헛되이 퇴각하다가 귀주(지금의 귀성) 남쪽에서 도순검사 양규에게 격퇴되어 크게 패하였다. 또 큰 비를 만나 인마가 모두 피폐하여 병장 기계를 내버리고 허둥지둥 달아나고 말았다. 이것이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 (국기 3343-334년, 서기 1010-1011년)

당시 고려는 의연히 송나라와 연락을 하여 또 압록강 남쪽 기슭 일대에 여러 진성(鎭城)을 쌓아 서북방 경영에 힘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거란을 자극하여 거란은 앞서 맺은 서희, 소손녕의 협정을 무시하고 압록강 동쪽 기슭의 토지를 요구하면서 현종 9년(국기 3351년, 서기 1018년)에 소배압이 약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제3차 침입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그때에 소배압은 도처에 손해를 받으면서 신계(황해도) 부근까지 들어 왔다가 한갓 타격만 받고 퇴각하던 도중에 귀주에서 상원수 강감찬과 싸워 크게 패하여 살아 돌아간 사람이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뒤로 거란의 세력이 점점 기울어져 또다시 고려와 충돌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였다.

(나) 『윤관의 여진 정벌』먼저 윤관의 출정에 이르기까지 고려와 여진의 관계를 살펴보면 원래 여진은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종족으로서 고구려 시대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졌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에 고구려의 유민은 말갈과 합세하여 발해국을 세웠다. 그러나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된 뒤로 특히 송화강 동쪽에 살던 여진족(말갈을 이때에는 여진이라 부름)은 많은 부락에 나뉘어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권은 점점 동남으로 뻗어 나와 서북으로는 압록강 동쪽 기슭과 동북으로는 함흥 부근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여진족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고려 초기부터 각 부락의 추장들은 많이 입공(入貢)하였으며, 또 내부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대광, 장군 등의 칭호를 주어 기미하는 동시에 제9대 덕종 때에 이르러서는 압록강 입구부터 반도를 횡단하여 정평의 도련포까지 장성을 쌓아 그들을 방비하였다. 문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들 여러 부락 사이에(특히 동북 방면의 동여진) 내홍과 분쟁이 심하여 우리에게 내부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우리의 동해안에 여진의 해적이 횡행하여 제15대 숙종 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송화강의 지류인 아륵초객(阿勒楚喀) 유역(하얼빈의 남방)에 살던 완안부의 세력이 점점 강성하여 고려의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전부터 우리에게 내부하고 있던 갈뇌전(曷懶甸, 함흥 지방인 듯)의 여진까지 정복하고 우리의 경역을 침범하므로 자주 충돌이 있었다.

윤관은 미리부터 여진의 세력 중 특히 완안부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정부에 건의하여 군비 충실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예종(숙종의 아들) 2년(국기 3440년, 서기 1107년)에 이르러 마침내 숙제인 여진 정복을 결행하게 되었다. 윤관이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과 같이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평성을 넘어 북으로 나아가 여진의 소굴을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각지에 진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니 여진의 촌락을 격파한 것이 135요, 참획한 것이 1만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역(함흥 저편)에 영주, 길주 이하에 9성을 쌓아 옛 강토의 일부를 회수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완안부는 한편으로 9성을 침노하며 다른 한편으로 화친을 청하여 9성을 돌려주기를 빌었다. 우리 측에서도 9성은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여진의 입공을 조건으로 9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 뒤 예종 10년(국기 3448년, 서기 1115년) 경에 이르러 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고려인 함보(函普)의 자손이라 함)가 일어나 나라를 세워 금이라 이름하고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의 아우 태종 때에는 요를 멸하고 송나라를 남으로 쫓아 중국의 북부 일대까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