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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의 후기(고려조)
  • 제3장 고려 후기의 동란
  • 2. 몽고와의 관계

2. 몽고와의 관계

(가) 『몽고의 침구와 강화 천도』 몽고족이 막북(외몽고)에서 발흥할 때에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매우 어수선하였다. 원래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는 대개 평화 상태로 계속되더니 제21대 희종에 이르러 금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막북의 몽고족 사이에 철목진이 일어나 내·외몽고를 통일하고 대한(大汗,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성길사한이라 일컬으며(희종 2년, 국기 3539년, 서기 1206년) 사방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때에 동남에 금나라의 반란한 장수 포선만노가 세운 동진국(간도 지방)과 거란의 유종이 세운 대요수국(만주 해성 부근) 등이 벌어져 있어 국제 관계가 자못 혼란스러웠다. 그 뒤 거란인은 몽고의 세력에 몰려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제21대 고종의 초년) 서북 각지를 소란스럽게 하였다. 고려에서는 김취려, 조충 등이 몽고와 연락하여 평정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몽고가 관계를 맺은 시초이다. 몽고가 동진국을 멸한 뒤로는 고려, 몽고 양국이 전면적으로 경계를 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앞서 몽고의 사자가 고려에 다녀가다가 압록강 밖에서 피살된 일이 있었는데(금나라 사람의 소행인 듯) 몽고에서는 전부터 침략의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그 책임을 고려에 돌려 제23대 고종 18년에 (국기 3564년, 서기 1231년) 몽고 태종(성길사한의 아들)은 살례탑을 시켜 침략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는 최우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최우는 몽고인의 침략 정책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태가 용이하지 않음을 깨닫고 한편으로는 사절을 몽고의 진영에 보내어 우선 화약을 맺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론을 물리치고 강화에 터를 닦아 천도를 단행하였다.(고종 19년) 이와 같이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끝까지 몽고와 항전하겠다는 결의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몽고인은 유목 민족이므로 기병에 의한 육전에는 매우 강하나 수전에는 하잘 것이 없는 까닭이다. 곧 최우는 적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기전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약 30년 동안에 몽고는 대군으로 침입한 것이 전후 6회나 되었다. 이에 우리 측에서는 삼별초가 국군의 중심이 되어 지방군과 백성과 더불어『게릴라』전법으로써 멀리 온 몽고군을 도처에서 요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며 한편으로는 청야 전술로 연안지방의 백성과 물자를 해도로 옮겨 놓고 몽고군을 괴롭혔다. 당시 몽고군의 말굽은 북부 일대는 물론 남으로는 경주에까지 미쳤으나 강화에는 한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 한갓 출륙 즉 송경으로 환도하기를 재촉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강대한 몽고 세력은 좀처럼 움츠러들지 않았고 각지의 백성은 전쟁의 피해를 입어 생업을 잃고 헤매는 형편으로 온 나라가 점점 피폐하기에 이르렀다. 강도(강화)에서는 최우의 뒤를 그의 아들 최항과 손자 최의가 계속하여 약 25, 6년 동안 항전을 계속하다가 고종 45년에 어리석은 최의가 장군 김준 등에게 피살되었다. 정권이 비로소 국왕에게 돌아오자 몽고에 대한 방침도 차차 변하여 평화 정책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46년에 태자 전을 몽고에 보내어 호의를 표하고 강도를 버리고 옛 도읍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였다.

몽고와의 관계는 이로부터 점차 평화 상태로 들어가 원종(고종의 아들) 11년(국기 3603년, 서기 1270년)에 송경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항구적 평화를 도모하여 결혼 정책을 쓰기로 하고 원종의 태자(뒷날의 충렬왕)가 원나라(몽고) 세조 홀필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왕실과 외국 왕실이 결혼을 한 시초이며 고려는 이로부터 제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왕은 대개 왕비로서 원나라 왕실의 공주를 맞아들였다. 이러한 결혼 정책으로 말미암아 양국 사이에 평화가 끝까지 유지되었으나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은 매우 심하였다.

이 대몽 화친 정책은 고종 말년에 최씨가 무너지고 정권이 왕실에 돌아온 뒤로 시작된 것이다. 본래 조정에는 대몽책에 대해 문신과 무인 사이에 두 파로 의견이 갈려있었다. 즉 최씨를 중심으로 무인들은 국위를 지키자는 견지에서 항전을 주장하였고 유승단, 이장용 등 문신 일파는 이른바『이소사대』가 국가를 안보하는 좋은 방책이라 하여 화친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씨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무인의 주장이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러다가 고종 45년에 최씨의 기성 세력이 몰락되고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자 문신이 차차 대두하여 대몽책은 친화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무인들의 불평은 큰 암류(暗流)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원종 11년에 이르러 몽고의 압력 밑에서 환도가 실현하게 되자 무인의 불평은 드디어 동란으로 바뀌었다. 전부터 항몽 전선의 중심이 되어온 삼별초는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을 합쳐 일컫는다.】 배중손의 지휘 아래 동란을 일으켜 송경 정부와 인연을 끊고 새로이 정부를 만들어 끝까지 몽고와 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승화후(이름은 온이니 왕족임)를 왕으로 세우고 진도로 내려가 그곳을 근거로 얼마 동안 항전을 계속하다가 송경과 몽고의 연합군에게 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제주로 들어가 저항하더니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패망하고 말았다. 이 삼별초의 난은 전후 4년에 걸쳐 끝까지 결속을 굳게 하여 강대한 세력과 싸운 것이니 이는 고려 무사의 전통적 정신을 십분 발휘한 것이다.

(나) 『여몽 연합군의 동정』 당시 몽고의 세력은 그의 태조 성길사한 이후로 사방을 침략한 결과 그의 판도는 아시아의 대부분과 동유럽 일대에 걸쳐 역사상에 미증유의 대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세조 홀필열 때에 이르러서는 강남의 한구석에 남아있던 남송까지 멸하여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도읍을 연경(북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원이라 하였다.

원나라 세조는 일찍부터 일본을 경략하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려와 친선 관계를 맺게 되자 이에 비로소 일본에 손을 댔다. 원나라에서는 먼저 고려의 힘을 빌려 일본을 불러서 타일러 보았으나 원래 일본은 섬 속에서 지내느라 당시 원나라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에 원나라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다. 원나라 세조는 드디어 무력으로써 일본을 정복해 버리기로 하고 고려의 충렬왕을 움직여 연합군을 일으켰다.(국기 3607년, 서기 1274년)

원의 흔도와 고려의 김방경이 전선 900척에 연합군 3만 3천을 거느리고 합포(마산 부근)에서 출발하여 대마도와 일기도를 차례대로 공략하고 북구주 연안을 엄습하였다. 그러나 마침 태풍을 만나 선척을 많이 상실하였고 또한 전비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 다음 7년 후에 즉 충렬왕 7년(국기 3614년, 서기 1281년) 5월에 다시 대규모로 동정 연합군을 일으켰다. 흔도와 김방경은 전선 9백 척에 4만의 연합군을 인솔하고 합포에서 전과 같은 진로를 취하였다. 원의 범문호는 따로 전선 3천 5백 척에 강남의 군사 10여 만을 싣고 일기에서 연합군과 만나 북구주 연안을 공습하였다. 그러나 때는 여름철이라 군중에 역병이 돌았으며 또다시 태풍을 만나 큰 손실을 보고 돌아왔다.

(다) 『몽고의 영향』 고려는 여러 해 동안 몽고의 침략을 받았으며 충렬왕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결혼 정책으로써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은 매우 심하여 정치, 법령에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왕은 자주 원나라의 수도에 출입하여 정사를 게을리하였다. 때로는 원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부자 형제 사이에 정권 다툼의 추태까지 일어났다. 이에 근신, 환자, 역관 등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여 기강이 매우 문란하였다. 원나라의 왕실과 정부와 사자 등의 토색 또한 심하였으므로 재정이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일반 왕실도 오랜 시간 동안 전란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가렴주구의 고통을 당하였으니 이때에 국가 전체가 피폐하게 되었다.

문물 관계의 교류도 성행하였다. 제26대 충선왕은 일찍이 정사를 아들 충숙왕에게 맡기고 원나라 수도(북경)에 건너가 만권당을 짓고 원나라의 거유 석학인 염복, 요수, 우집, 조맹부 등을 모으고 본국으로부터 명유 이제현을 불러 그들과 같이 서사(書史)를 토론하고 강구함으로써 낙을 삼았다. 특히 조맹부의 서법은 이러한 관계로 일찍부터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왕실에는 6, 7대에 걸쳐 몽고 왕실로부터 왕후가 들어왔는데, 그들은 겁령구(스스로 부리는 사람을 이름)를 많이 데리고 와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몽고의 언어와 풍습과 복식이 궁중과 상류 사회에 자못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여습이 후세에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 적지 아니하다.

한편 고려에서도 처녀가 궁녀로 혹은 몽고 귀족의 배필로 뽑혀 간 것이 적지 아니한데 그 중에는 원나라 순제의 왕후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로 말미암아 고려의 생활양식이 몽고의 상류사회에 전파된 것이 많았다. 이른바 『고려양』이라 하는 것이 이를 말한다. 고려, 몽고 두 나라 사이에 인물의 교류가 대개 이같이 성행하였는데 서역인(대개 회교도)도 영향을 받아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 적지 아니하였다. 충렬왕 때의 장순룡과 고려말 경의 설손이 가장 유명하다.

이밖에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문물로서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수학, 역법, 관측 의기 등 학술에 관한 것과 화포, 화약, 서면(西錦)·목면의 종자, 포도주 등 신기한 물건도 적지 않았다. 【면실(棉實)과 문익점】 이 외래 물품 가운데에도 특히 목면과 화약은 우리의 생활과 국방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목면은 고려 말부터 성하게 재배되어 면포가 우리 의복 원료의 주류가 되었다. 【화약과 최무선】 화약은 고려 말에 왜구 격퇴에도 이용하였으며 화통도감을 두어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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