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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공민왕의 배원 정책과 옛 영토의 회수

1. 공민왕의 배원 정책과 옛 영토의 회수

제31대 공민왕 시대는 내외의 정세가 복잡하고 혼돈하여 실로 다사다난한 때였다. 대륙은 원·명 교체기에 접어들었으므로 외교관계는 극히 미묘하였다. 고려에 미쳐오는 그 파장도 또한 수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으로는 폐정이 많이 나오고 강기가 크게 무너져 민심이 동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왜구와 홍두적의 침구로 국세가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초기에는 국제정세를 잘 이용하여 원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한 결과 비록 일시적이나마 국세 진흥에 있어 자못 활발한 형세를 보였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쇠망기에 들어 통제력이 풀리자 한족의 반란이 사방에서 봉기하였다. 한산동, 유복통(그의 무리들은 홍건을 썼으므로 홍두적·홍건적 또는 홍적이라 부름) 등은 영평(하북성)에서 일어나고 주원장은 호주(안휘성)에서, 장사성은 고우(강소성)에서, 방국진은 대주(절강성)에서 각각 일어나 원나라는 이에 와해의 지경에 이르렀다.

원나라는 혼자의 힘으로 내란을 진정할 수가 없으므로 고려에 구원을 청하였다. 고려에서는 유탁, 최영 등을 (강소 지방에까지) 보내어 원나라 군사를 도와 다소 승리를 거두고 들어온 일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원나라의 허약한 실정이 더욱 폭로되었고 일찍부터 원나라의 압력을 배제하려고 하던 공민왕은 정동행중서성 이문소(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의 변한 모습임)를 폐하고 관제와 직명도 문종 시대의 구제도로 고쳤으며 (앞서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와 직명을 약간 변경한 것이 있었음)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발호하고 있던 불량배를 주륙하였다.

그리고 다시 옛 영토의 회수에 착수하였다. 앞서 몽고병이 침입할 때에 조휘와 탁청 등이 본국을 배반하고 난을 일으켜 철령 이북의 땅을 몽고에 붙이고 몽고에서는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형식상 그 지방을 다스려 왔다. 서북은 최탄이라는 자가 배반하여 평양 이북의 60성으로써 몽고에 항복하여 몽고에서는 평양에 동녕부를 두어 그 일대를 관할하고 자비령을 국경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동녕부의 관할에 속한 땅은 충렬왕 때에 원나라와 교섭하여 회수하였으나 철령 이북의 땅만은 공민왕의 초년까지 원나라에 속하였다. 공민왕 5년(국기 3689년, 서기 1356년)에 이르러 유인우에게 쌍성을 공략하게 하여 이것을 빼앗았다. 이 싸움에 쌍성 사람 이자춘(이 태조의 아버지)이 관군에 내응하여 공을 세워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영흥으로부터 북청에 이르는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서북은 대륙 교통의 요충을 점거하여 인당, 최영 등을 시켜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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