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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전기(국기 3725-3900년, 태조-명종 말)
  • 제1장 초기의 정치와 문화
  • 1. 이씨 조선의 개국과 국도 문제

1. 이씨 조선의 개국과 국도 문제

【조선의 개국】 고려 말 영흥 출신의 무신인 이성계의 출현은 개경의 구귀족과 왕실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개경의 구세력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일파는 대개 여말의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고 신세력인 이성계 일파는 그것을 타파하여 개혁하려 하였다. 이 두 세력 사이에 격렬한 대립과 투쟁이 전개되다가 결국 이씨파의 일방적 승리에 의하여 구세력은 제거되고 최후의 괴뢰 왕실도 없어지고 대신 새로운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국기 3725년(공양왕 4년) 임신년 7월 17일은 새로운 귀족 이성계가 무혈혁명에 의하여 개경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던 개국의 첫날이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태조(고친 이름은 단(旦))이니 태조는 즉위 초에 인심을 너무 자극시키지 아니하려 함인지 혹은 대명관계 때문인지 국호를 전대로 고려라 하고 모든 제도와 조직을 고치지 않아서 언뜻 보면 구왕조의 연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국호를 정식으로 고쳐 조선이라고 한 것은 즉위 2년 2월이었다.

【태조의 정책】 태조를 중심으로 한 혁명파는 대개 불교를 배척하던 여말의 유신들이었으므로 태조는 그들의 주의, 주장에 의하여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치국의 원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유교는 이후 5백년 간 정치와 교학에서 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에까지 그 원리가 지배하였다. 또 태조는 종래의 농본주의에 입각하여 개국 벽두부터 농업의 장려, 전야의 개간, 호구의 증식을 취하여 지방 관리를 독려하였다. 이 정책은 대대로 계승되어 농업국가로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양 정도】 그런데 태조의 즉위 초의 제일 관심사는 국도를 옮겨 정하는 문제에 있었다. 당시 개경은 옛 세족의 오랜 근거지로 전래의 음양서(미신서)에 그곳은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불길의 땅이라는 설이 있어 태조는 여기에 사로잡혀 무엇보다도 천도 문제를 긴급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친히 신하를 데리고 계룡산(공주), 모악산(경성의 서쪽), 한양(경성) 등지를 돌아다니며 도읍터를 구하다가 3년 겨울에 드디어 국도를 한양에 정하고 궁전·종묘·사직·관아 및 도성을 쌓아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실로 태조의 심신을 수고롭게 한 바가 많았던 것이다.

【개경 이어】 그러나 천도 후 불과 5, 6년인 정종 원년에 이르러 갑자기 새로운 도읍을 버리고 도로 옛 도읍(개경)으로 이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중요한 이유는 전년 새로운 도읍지에서 왕실의 큰 불상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태조의 제5남 방원(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태조의 막내 아들) 일파를 죽인 골육의 참변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정종 2년에 개경에서도 또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니 제4왕자 방간과 방원의 싸움이었다. 정종은 방원을 세자로 봉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였다. 이 사람이 곧 제3대 태종이다.

【한양 환도】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뜻을 중히 여기며 즉위 후 곧 새로운 도읍지 한양으로 환도하려 하였으나 조정 신하들 사이에 다른 의논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고 여러 해 미루었다. 드디어 재위 5년에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여 5백 년 정치 및 문화의 중심지로 일정불변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태종은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민의를 중히 여기고 미신에 관한 서적을 금하였으며 불교를 누르고 사원을 정리하였다. 【동활자】 재위 3년(국기 3736년, 서기 1403년)에 동활자를 만들어 많은 서적을 인쇄한 것은 그의 가장 저명한 치적의 하나였다. 금속활자는 이미 고려 말엽에도 만든 일이 있었으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첫 실험이요, 또 서양 활자의 발명보다도 반세기나 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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