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 국사교본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전기(국기 3725-3900년, 태조-명종 말)
  • 제1장 초기의 정치와 문화
  • 2. 서울의 도시 시설

2. 서울의 도시 시설

새 도읍지 한양은 고려시대의 남경 소재지로 국초에 한성부라 이름을 바꾸고 부제(府制)를 두었지만 역대의 시설로는 보잘 것이 없었고 조선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도시다운 시설을 갖추었다. 부의 범위는 시외 즉 성 밖 10리의 연접지까지를 포함하였으므로 도성의 그것과는 물론 일치하지 않는다. 도성의 전체 길이는 9천 9백 7십 5보로 지금과 일치하고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출입문은 4대 정문과 4소문이 있었다.

【부(部)·방제(坊制)·장행랑(長行廊)】 옛 수도의 부·방제를 습용하여 시내(즉 성안)를 5부(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52방(뒤에 49방)으로 나누고 시가 간선도로의 양측에는 장행랑(장옥)을 세워 상인에게 상점을 열게 하였다. 【종루(鐘樓)】 특히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 십자로에는 2층 누각을 세워(세종 때에 고쳐지었다.) 누각 위에 큰 종을 달고 아침저녁으로 시민에게 시각을 알리고 누각 아래에는 인마를 통행하게 하는 십자형의 길이 놓여 있었다. 그 부근에는 육의전(육주비전)이란 6대 상점 즉 견직점·면포전·면주전·지전·저포전·어물전을 비롯하여 기타 여러 상점이 벌여 있었다. 이 종로 네거리는 도시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개천(開川)】 도랑 시설은 성안 중앙에 개천을 넓게 파고 수축하여 각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아 수구문으로 빠지게 하고 곳곳에 교량을 놓아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다. 【방화 시설】 방화 시설은 성안에 인접한 가옥에 방화장이란 것을 쌓게 하고 각 관아 안에는 소화용의 우물을 파고 종묘, 궐내 및 종루에는 구화 기기란 소방 기구를 비치하게 하였다. 【금화도감】 또한 특히 세종 때에는 금화도감이란 일종의 소방서 같은 것을 두어 방화의 사무를 맡게 하였는데, 화재가 있을 때에는 종을 쳐서 알리게 하였다. 그때의 방화기구라는 것은 지금의 것에 비하여 대단히 유치하였지만 시설 방법만은 거의 현대적이라 할 만큼 용의주도하였다.

【기타 시설】 기타 문교 시설은 성균관(태학)·사학(중부·동부·남부·서부의 4부 학당), 관측 시설은 관상감, 의료 시설은 제생원·혜민국·동서활인원 등이 있다. 신사는 목멱사(남산), 사찰은 태조 때의 흥천사(정동)·흥덕사(동부), 세조 때의 원각사(파고다 공원) 등이 있었다. 【호수(戶數)】 도성 내외의 가옥의 수효는 때에 따라 다르지만 세종 말년의 통계를 보면 성안에 1만 7천 15호, 성 밖(십리)에 1천 7백 7십 9호가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