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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전기(국기 3725-3900년, 태조-명종 말)
  • 제2장 대외관계
  • 2. 야인(여진)과의 관계

2. 야인(여진)과의 관계

【명과 야인의 관계】 만주족인 여진을 이때에는 흔히 야인이라 일컬었는데, 그들은 앞서 대원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제국이 붕괴되고 명이 일어나자 명에 속하여 이른바 3위(건주위·야인위·모린위)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일 뿐 실질적으로는 명의 통치권 밖에 속하여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로 지내었다.

그리하여 명에 귀순하는 자에게는 관작을 주고, 거주 지역을 허락하고, 또 상업 이익을 원하는 자에는 무역을 허락하고, 변경을 침노하는 자는 토벌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조선과 야인과의 관계】 조선과 야인의 관계도 역시 비슷하여 그들의 이반과 복종이 무상하였는데 그들은 대개 의식주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침구의 야성을 발휘하였다.

【동북 방면】 동북 방면(함경도)의 야인은 여말 이래 태조의 경략에 의하여 그들을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어 처음으로 두만강 안의 땅을 차지하였던 바, 그 후 그들이 매해 북계를 소란하게 하므로 태종 때에는 할 수 없이 후퇴의 책략을 써서 지금의 함경 이북의 땅을 버리기까지 하였다.

세종 때 조정의 신하 사이에 또 후퇴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대왕은 조종의 옛 강토를 한치의 땅이라도 줄일 수 없다 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6진 개척】 그 후 김종서를 시켜 이 방면의 경영을 담당하게 하여 마침내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북변 6진을 완성하고 장성을 두만강 변에 쌓아 국방을 엄히 하였다. 6진은 신개척지인 만큼 주민의 충실을 필요하였으므로 남쪽 여러 도의 백성을 전후 이곳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세조, 성종 때에 가끔 야인이 침입하여 북계를 소요하게 하였으나 곧 장병을 보내어 토멸하였고 그 후에도 이러한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었으나 6진의 변화는 없었다.

【서북 방면의 야인과의 관계】 서북 방면(압록강)의 야인에 대한 경략은 역시 고려 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태조의 무공이 여기에도 많았지만 태종 때에는 새로 강계부를 설치하고 또 갑산의 일부를 나누어 여연이란 군을 두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파저강(압록강)의 큰 지류인 혼강 방면의 야인이 자주 쳐들어와 변방의 백성을 괴롭게 하므로 여러 차례 장병을 보내어 그 소굴을 두려빼고 여연 밖에 자성(여연과 강계 중간)·무창(여연 동쪽)·우예(여연·자성 중간)의 3부를 전후 가설하여 서쪽 변경의 4군을 완성하였다. 【4군 설치】 이것이 위의 6진 개척과 아울러 세종대왕의 영웅적 사업인 동시에 조선 역사상 하나의 획기적 사실이었다. 조선의 북계가 이때에 완전히 두만강과 압록의 상류에까지 도달하였던 것이다.

【4군 철폐】 그런데 그 후 4군의 땅은 방비의 곤란으로 조정의 신하 사이에 철폐의 논의가 일어나 단종 때에 먼저 우예·여연·무창의 3군을 파하고 세조 때에는 나머지 1군인 자성마저 파하였다. 그러나 4군 철폐는 결코 영토의 포기가 아니고 한 행정상의 변동, 국방선의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조는 서변을 침략하는 건주야인(파저강 방면) 이만주 등에게 여러 차례 소탕의 타격을 주어 마침내 그 괴수를 목 베었고 성종 때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역시 건주야인을 쳐서 대첩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서변·북변의 소소한 외환은 후에도 그칠 날이 없었다.

【경성·경원의 무역소】 조정은 국초부터 야인을 오직 무력으로만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고 혹은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태종 6년) 조선의 소금·철을 자유로이 사가게 하고 혹은 야인 추장의 조공과 귀화를 장려하여 그들에게 관직과 의복과 식량·안마·가사·노비 등을 주었다. 조공도 일종의 무역이지만 그들이 조선에 가지고 오는 물품의 주요한 것은 마필을 위시하여 토표·초서피·웅피·녹피 등의 털가죽이었고 또 그들이 가져가는 물품은 대개 우리의 금은·저포·마포·농구·식기·지물과 기타 미두·염장·주류 등의 식료품이었다.

【북평관(北平館)】 당시 서울에는 북평관(지금의 동대문 안)을 두어 야인의 유숙소로 하였으니 명나라 사신의 태평관과 왜국의 사신이 묵는 동평관(지금의 누정가)과 병립하여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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