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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중기(국기 3901-4057년, 선조 원년-경종 말년)
  • 제2장 왜란과 이순신
  • 2. 제1차 왜란과 이순신의 활약

2. 제1차 왜란과 이순신의 활약

【풍신수길의 망상】 이때 일본에는 풍신수길이란 괴걸이 있어 어수선한 그 나라를 통일하고 지나친 망상을 일으켜 조선과 명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먼저 대마도주에게 우리의 내정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 명을 칠 터이니 길을 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물론 조정에서는 허락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이를 거절하였다.

선조 25년 임진년에 풍신수길은 드디어 소서행장, 가등청정, 흑산장정 이하 여러 장수에게 15만 대군을 주어 조선에 침입하게 하였다. 【왜군의 상륙】 이 해 4월에 적의 부산 상륙의 급보가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당황하여 이일, 신립 등 날랜 장수를 연방 보내어 왜군의 진로를 막았으나 모조리 낭패를 보았다. 【평양 점거】 선조는 부득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향하니 적은 무난히 쳐 들어와 서울을 점령하고 일파는 동북(함경도)으로 향하고 다른 일파는 서북(평안도)으로 향하여 평양까지 닥쳐왔다.(6월) 불과 두 달 동안에 적이 이와 같이 깊이 쳐 들어온 것은 오랜 안일 속에 우리군대의 훈련이 부족하고 방비가 허수하였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적에게는 이때 조총이란 신예 무기가 있어 특별한 효과를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해상 방면은 처음 경상 우수사(본영은 거제도) 원균의 과실로 인하여 적이 쉽게 쉽사리 상륙하게 하였다. 그 후 적의 해상활동 내지 보급을 곳곳에서 분쇄하여 맹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항상 제해권을 잡았던 이는 전라 좌수사(본영은 여수)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활약】 그는 일찍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까 하여 미리 모든 전함을 수리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다. 그 전함 중에는 귀선이란 거북 비슷한 모양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무수한 철 송곳을 꽂고 안에는 전후좌우로 총포를 걸어 놓아 공격에 당돌하고 움직임에 재빠른 배가 있었다. 이러한 이름의 배는 근세 초기부터 있었으나 이러한 구조와 장치는 이순신 장군이 특히 창조하였던 것이다. 장군은 다른 수군과도 연락하여 모든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여러 차례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을 번번이 쳐서 깨뜨렸다. 제1차로 옥포(거제도 동쪽 해안)에서 제2차로 사천·당포(통영 부근)·당항포(고성 회화면)에서, 【한산도 해전】 그 후 제3차로 한산도(거제와 고성 사이) 앞바다에서 적선을 모조리 쳐부수어 적의 혼담을 꺾는 대첩을 올리었다. 특히 한산도 해전은 유명한 싸움으로 우리 군은 이 싸움에서 적의 함선 70여 척을 파멸하고 무수한 적병을 바다 속에 장사하였다. 이순신의 이러한 활약 때문에 왜군이 멀리 서해로 통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전라도 남쪽 해안에도 침범하지 못하였다. 위의 전공으로 이순신은 후에 삼로(충청·전라·경상) 수군 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통영을 두고 삼도 해군의 총지휘관의 직임을 맡았다.

【국내 각처의 의병】 이때 국내 각처에서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의분에 불타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와 같은 유자들과 휴정(서산대사) 및 그의 제자 유정(사명당) 같은 승려들도 의병(의용군)을 일으켜 도처에서 적과 싸워 혹은 육탄으로 장렬한 죽음을 한 사람도 있었고 혹은 적을 쳐부수어 공을 세운 사람도 있었다.

【명나라의 구원】 조선의 요청으로 명에서는 처음 장병을 보내어 왜의 서북근거지인 평양을 치다가 실패하고 그 다음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심유경이란 자를 평양에 보내어 휴전을 꾀하게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여송에게 대병을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여송은 계사 정월에 우리 군과 힘을 아울러 평양을 쳐서 빼앗았으니 왜는 남으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여송은 승승의 기세로 왜군의 뒤를 쫓아오다가 벽제관(고양) 싸움에서 대패를 당하고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니 왜군은 일시 경성에 머물러 있었다. 【행주대첩】 이때 관군으로 경성 부근에서 외로이 적과 싸워 대첩을 올린 이는 전라 감사 권율이니, 즉 그는 계사년 3월에 행주산성(서한강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고 대적을 맞이하여 고군분투로 통쾌히 쳐부수었다.

이여송의 패배 후 명의 설객(說客) 심유경이 서울에 와서 또다시 화의를 제창하였다. 왜군은 해상, 육상을 통하여 조선군의 활동과 기타 보급의 곤란 등 여러 가지로 형세가 불리하므로 할 수 없이 화의에 응하여 경성에서 철수하여 물러났다.(계사년 4월) 명군이 이어 입성하여 또 왜군의 뒤를 쫓으니 왜군은 멀리 남쪽으로 달아나 부산을 근거로 하고 남방의 요지인 진주성을 에워싸서 공격하였다. 【진주 함락】 진주성은 전년 10월에 목사 김시민의 굳센 저항으로 적이 큰 손해를 입고 물러간 곳이었는데, 그 후 김시민은 전쟁 부상으로 죽고 그 대신 서원례가 목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에 역시 목사 이하 군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마침내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하고 말았다(같은 해 6월).

김시민의 진주 고수,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 권율의 행주 싸움을 임진 3대첩으로 꼽지만 서원례 이하의 장렬한 죽음도 조선의 혼을 보인 것의 하나라 하겠다. 왜군은 웅천(창원)과 서생포(울산) 사이에 성첩을 쌓고 오래 머물기를 꾀하더니 그 후 화의가 진행됨에 따라 대부분은 서서히 자국으로 물러갔다.

【환도(還都)】 경성이 회복되자 선조 이하 여러 신하도 서서히 북에서 환도하여(계사년 10월) 한편으로 부흥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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