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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전후의 국내 형편과 국교 회복

5. 전후의 국내 형편과 국교 회복

【전후의 상처】 7년에 걸친 전쟁이 조선·명·일본 3국에 준 영향은 대단히 커서 3국이 다 피폐해졌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은 더 심하였다. 적의 침공을 받은 것 이외에 명군의 북새와 등쌀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국내 인구가 소모되었는지는 전쟁 전과 전쟁 후의 호구에 관한 통계조차 전하지 아니하므로 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평시 경성의 호구가 8, 9만이었던 것이 임란 후에는 겨우 수만호에 지나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전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기타 도시, 농촌의 피폐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상도 한 지역은 왜구 침입의 문호요, 또 일시 그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다른 곳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또 흔히 전후에 따르는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인명을 잃었다.)

그러나 그 후 상하 관민이 전후 부흥에 온갖 힘을 다 하였던 까닭에 차차 평시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왜인에 대한 적개심】 전후에 조선인의 애국심과 민족적 의식은 결코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왜인에 대한 적개심이라든지 명나라에 대한 숭모심은 더욱 강렬하였다. 즉 명은 조선에 대하여 재조의 은혜가 있다 하여 우리 지식층의 존명 사상과 사대주의는 날로 커갈 뿐이었다. 이러한 사상과 주의는 훗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 이와 관계를 맺은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일본과의 국교 회복】일본은 풍신수길이 죽은 후에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그 뒤를 이어 국내를 정돈하면서 먼저 조선과 화의를 맺으려 하였다. 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여러 번 교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잘 듣지 아니하다가 선조 40년에 이르러 이를 허락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남녀의 귀환도 많이 있었지만 귀환되지 못하고 그냥 눌러 살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도기(陶器) 제조술의 전파】 귀환, 불귀환을 물론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일본에 전파된 문물과 기술이 있었으니, 도기 제조의 기술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전쟁 중에 왜인이 직접 약탈하여 가지고 간 것도 많았으니, 예를 들면 여러 가지의 도서와 실물과 기타 활자 등이었다. 【조선 활자의 모방】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조선 도서의 중간(重刊)과 조선 활자의 모방이 행하여져 일본 문화상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않았다.

덕천(德川, 도쿠가와) 막부와 수교한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조 40년부터 시작되어 이후 거의 사신의 왕래가 그치지 아니하였고 대마도와 통상 무역을 한 것도 광해군 초부터 시작되어 부산에 왜관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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