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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중기(국기 3901-4057년, 선조 원년-경종 말년)
  • 제3장 북방 문제와 호란
  • 2. 인조의 반정과 호란

2. 인조의 반정과 호란

앞서 말한 광해군의 폐모 사건은 지금껏 북인에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좋은 이유거리가 되어 서인은 마침내 광해군을 하고 대신 인조를 세우게 되었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라는 것이니, 이 반정에 따라 앞서 폐모를 강청하던 북인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인은 극형에 처해지고 그 나머지도 귀양 가고 쫓겨난 자가 약 수백 인이었다. 그리하여 북인 정권은 저절로 서인의 손으로 넘어 왔다.

그 후 서인 사이에 공을 다투는 난리(이괄의 난)와 당쟁이 발생하였다. 이 어수선한 사이를 틈타 후금의 태종(누르하치의 아들)이 군사를 보내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피난하더니 할 수 없이 거기서 화의를 맺고 형제국의 약속과 기타 몇 가지의 조건을 허락하고 돌려보냈다. 인조 5년에 발생한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인조 14년에 후금 태종은 대청 황제라 하였는데, 이때 조선이 청과 화의를 끊고 명나라와 통하므로 태종은 친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인조의 항복】 청 태종은 경성에 들어와 한편으로는 왕족과 귀족이 피난해 있는 강화도를 함락하고 남한산성의 포위를 심히 하므로 이때 성안에서는 조정의 신하 간에 주전파와 주화파가 한참 어수선히 다투었다. 마침내 주화파 최명길의 말을 쫓아 성문을 열고 삼전도(송파)에 이르러 항복하니, 이것을 병자호란이라 한다. 이것은 근세 사상에 처음 나타나는 굉장히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병자의 난후 그 치욕을 씻으려 하여 의주부윤 임경업은 몰래 명나라와 통하여 청나라를 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하였으며 일찍이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북으로 청나라를 치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효종도 역시 재위 10년에 돌아가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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