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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중기(국기 3901-4057년, 선조 원년-경종 말년)
  • 제5장 새 시설과 새 문화의 싹틈
  • 1. 새 시설

1. 새 시설

지배계급의 당쟁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국가사회의 당면한 모든 현실문제에 대하여는 미상불 한편으로 위정자의 고심도 적지 않았다. 왜란 이후 군제의 재편성이라든지 국가경제의 개선이라든지 민중생활의 복리에 관하여 여러 가지 고안이 제출되어 종종 새 시설을 보게 되었다.

군제는 국초 이래의 5위(경군)의 제도가 없어지고 임란 중에 훈련도감이 신설된 후 뒤를 이어 네 군영이 차례로 생겼다. 【5군영】 5군영은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인데, 훈련도감까지 합하여 5군영 혹은 5영군이라 하였다. 훈련도감은 경내의 장정을 뽑아 삼수[포수·사수·살수]의 무예를 훈련시키던 곳이며, 총융청은 인조 2년에 둔 것으로 남양·수원·장단의 3진의 군무를 통솔하던 곳이요, 수어청은 역시 인조 2년에 남한산성을 쌓고 그곳을 중심으로 부근의 여러 진(鎭)을 지키기 위하여 인조 4년에 남한산성 안에 둔 것이며, 어영청은 효종 3년에 둔 것으로 총포병과 기병을 주로 한 병영이며, 금위영은 특히 경성을 수호하는 병영으로 숙종 8년에 둔 것이다. 각 영에는 대장·중군·별장 이하의 장병들이 예속되어 있다. 금위영·어영청에 소속된 군인은 반농 반병의 향군으로 번차례로 상경하여 입번하였다.

【대동법의 시행】 그 다음 민폐를 덜고 국가의 재정을 재편성하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것이 식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제가 되었다. 대동법은 즉 전세(조세) 외에 지방의 토산을 바쳐오던 공물이 중간에 여러 가지 폐해가 있었으므로 그 폐해를 덜기 위하여 토산물을 전세와 같이 미곡으로 바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이론과 실행 방법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선조 때의 율곡 이이였는데 그 후 오리 이원익·포저 조익 등이 대동 선혜의 이름으로 이 법의 구체안을 제의하여 인조 때에 일부 지방에서 실시하다가 오래지 않아 폐지되고 효종 때에 김육의 요청으로 재차 지방에 따라 차차 시행하였다.

【통화의 실시】 이때 현실 문제의 하나로 또 식자 사이에 논의되던 것은 통화 문제였다. 화폐는 국초에 『조선통보』를 비롯하여 저화, 전폐를 만든 일이 있었으나 널리 또 오래 행하지 못하였고 그 대신에 주로 곡식과 포목을 매매하여 사용하여 왔다. 이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과 폐해가 있었고 나라가 부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동철로 돈을 만들어 쓰자는 의론이 선조 때의 수상 한음 이덕형 등에 의하여 제창되자 대대로 그 의론이 거듭하더니 인조 11년에 드디어 『상평통보』란 돈을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고 그 후 김육이 화폐 유통의 이익을 절실히 주장하여 효종 2년에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서북 여러 도와 서울 시내에서 사용하였다. 그 후 6, 7년 뒤에 또 폐지되었는데 숙종 4년에 이르러 재차 주전론이 일어나 마침내 실현되었다. 주전의 원료는 구리와 주석을 썼는데 조선에서는 이미 일찍부터 광산 채굴을 금하여 왔으므로 그 원료를 타국에 의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구리는 일본에서, 주석은 청나라(북경)에서 무역해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육】 잠곡 김육은 식견이 높은 정치가요 학자였으니, 그는 비단 대동법의 실시, 화폐 유통의 필요를 논했을 뿐 아니라 그밖에 중국의 수차의 제도와 수레 사용의 이익을 말한 일도 있다. 또 일찍이 서양력의 합리성을 논하여 그의 주청으로 효종 4년에 재래의 역법을 폐지하고 시헌력이란 새로운 역법을 채용한 일도 있었다. 요컨대 김육은 당시 유자들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진보적 학자였다. 그는 남의 장점을 취하여 여러 가지 개선을 하려던 문명의 선도자요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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