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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중기(국기 3901-4057년, 선조 원년-경종 말년)
  • 제5장 새 시설과 새 문화의 싹틈
  • 2. 의식의 확대

2. 의식의 확대

선조·광해군 이전의 조선인의 의식과 세계관은 매우 좁았다. 세계의 문명이 중국과 인도에서 일어나고 또 그 발달이 이 두 나라와 조선 등 몇 나라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이들 몇 나라를 빼고는 그밖에 다른 문명국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조선인의 서양에 관한 지식】 따라서 선조·광해군 이전에는 서양에 관한 지식이 매우 빈약하였다. 중종 때에 이르러 비록 중국을 통하여 서양포(서양목)가 유입되어 서양이란 말은 듣게 되었지만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고 어떠한 나라들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선조 만년 무렵에 명나라 수도(북경)에 갔던 사신이 돌아올 때에 구라파 지도를 가지고 왔으므로 일부 식자층에서는 서양에 관한 지리 지식을 다소 알게 되었다. 또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야소회 선교사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란 천주교에 관한 책도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이때의 석학인 지봉 이수광은 천주교의 내용을 약간 소개한 일까지 있었다.

【화란 사람 박연 등의 표착】 인조 때에는 서양에 관한 지식이 점점 늘어 갔다. 인조 6년에 화란 사람 박연(J. Adam Weltevree) 등 3명이 표착하여 경성에 들어온 일이 그 동기이다. 훈련 대장 구인후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 중 박연은 대포를 잘 만들었으며 조선 여자를 얻어 자녀를 낳기까지 하였다. 【서양 문물의 도래】 또 인조 9년에 명나라 수도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돌아올 때에 북경에서 서양인에게 화포·천리경·자명종 따위의 기계와 서양풍속기·지도·천문서 및 기타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얻어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

인조 23년 소현 세자(인조의 장남)가 청에 인질로 있을 때에 서양인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과 사귀어 여러 가지 과학책과 천주교 책을 가지고 왔는데 세자는 귀국 후 3월에 불행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쨌든 인조 때부터 서양인과 접촉이라든지 그 문물의 도래로 인하여 서양과학 및 사상에 관한 지식과 호기심이 차차 커지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서양력에 대한 주의와 연구는 자못 시급한 것으로 여겨져 앞서 말한 김육은 관상감 제조(천문대의 수장)로서 왕에게 청하여 연구생을 북경에 보내어 새 역법을 강구하게 하여 효종 4년에 이것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화란 사람 하멜 등의 표착】 그런데 같은 해 우연한 일이지만 화란 사람 하멜(Hendrick Hamel) 등 30여 인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이듬해 서울로 송치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일시 훈련도감에 예속하게 하여 앞서 표착한 같은 나라 사람인 박연에게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성력(星曆)을 이해하는 자와 조총, 대포에 능한 자도 있었다. 그 후 13년 만에 하멜 등 8인은 일본 장기(長崎,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마침내 자국으로 돌아가 표류기를 저술하여 그들의 10여 년간 억류 생활과 조선의 풍속을 적었다. 이것이 조선의 사정을 유럽인들에게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다.

효종 때는 남한산성의 수치를 설욕하기 위해 이완을 훈련 대장에 임명하고 부지런히 북벌을 계획하였다. 이때 하멜 등 화란 사람이 이 북벌 계획에 있는 훈련도감의 병졸로 일시 예속되어 이완의 지휘와 훈련을 받았던 것은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하멜이 입경한 해는 여러 가지 흥미를 끄는 사실이 있지만, 【나선 정벌】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 해에 청국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나선정벌의 군대를 파견한 사실이다. 나선은 즉 러시아인(노서아인)의 음역으로 이때 러시아인(노인)은 차차 외흥안령을 넘어 흑룡강 유역에 침입하여 아극살성을 함락하고 알바진성을 쌓는 등 계속하여 동침 남하의 형세를 보이고 있었다. 청나라는 지역민들의 청에 의하여 비로소 러시아인과 충돌하게 되어 조선에까지 원군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조정은 이 요청에 의하여 효종 5년에 변급 이하 150명의 용사를 보내어 흑룡강 방면에 나아가 청병을 도와 러시아인을 쳐부수었고 또 효종 9년에도 역시 청의 요청에 응하여 신류 등 장병을 보내어 청군과 더불어 흑룡강 방면의 러시아인을 정벌한 일이 있었으니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접촉한 일은 이 효종 때가 처음이다. 그런데 러시아인의 세력은 매우 빠르게 확장되어 업신여길 수 없었다.

【서세동점의 향로】 서세동점의 향로를 둘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북으로 육로를 통하여 동침(東侵)하는 자, 다른 하나는 남으로 해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오는 자가 있었다. 러시아인의 동침은 전자에 속하고 포도아인(포르투갈인), 서반아인(에스파냐인), 화란인(네덜란드인) 등의 동래는 후자에 속한다.

서양인의 해상 동진은 서기 16세기 전반에 시작되어 포도아인이 최선편을 잡고, 그 다음이 서반아인, 또 그 다음이 화란인이었는데, 오랫동안 동양무역 패권을 잡은 자는 오직 화란뿐이었다. 화란은 서기 1602년(선조 35년)에 동인도회사를 창립하고 오래지 않아 자바섬의 빠다비아를 취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주위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는 동시에 중국·일본과 교통을 텄다. 특히 일본 막부는 평호(平戶, 히라도), 장기(長崎, 나가사키), 박다(博多, 하카타) 등지에 거류 무역을 허하였으며 서기 1623년(인조 원년)에는 북대만의 싼살바돌성, 산도밍고성을 취하여 이후 38년간 미리 근거지로 삼은 서반아인을 몰아내고 섬 전체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박연과 하멜 등은 다 전후 본국에서 자바와 대만을 거쳐 장기(나가사키)로 향하다가 조선에 표류된 것이나 서세동점이란 큰 물결에 뜬 한 잎사귀에 지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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