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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

천주교에 관한 서적은 선조·광해군 시대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서양 과학서류와 함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주의를 끌었다. 얼마 동안은 순연한 학적 호기심과 지적 탐구욕을 가지고 그런 서적을 대하였으나 그 후 천주교에 관한 책은 점점 민간에 유행되어 신앙과 실천 운동으로 차차 변화하였다. 이때 정권을 잃은 남인학자와 기타 불평이 많은 계급과 지방에서 특히 주목하였다. 【천주교의 실천 운동】 그리하여 남인 명사 중 한 사람인 이승훈은 정조 7년(국기 1416년, 서기 1783년) 겨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많은 서적을 구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남인 신진파의 천주교 실천운동에 가장 기록적이며 꽃다운 장면으로 이때 그 방면의 인사에게 매우 큰 자극과 영향을 끼쳤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신앙 실천운동이 열렬하여지면서 사류 중에 신주를 파묻고 제사를 폐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유교를 근본으로 삼는 재래의 전통과 여간 배치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정조 10년 이후 조정에서는 이를 사학이라 하여 법으로 금하고 중국에서 오는 모든 서적의 수입을 엄금하였다. 정조 15년(신해년)에는 사인으로 신주를 없앤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워낙 관대한 정책을 써서 뒷날처럼 광범위하고도 심한 학살과 박해는 가하지 아니하였다.

【주문모(周文謨)의 입국】정조 19년(국기 4127년, 서기 1794년)에 주문모란 청나라의 천주교 신부가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7년간 비밀히 전도에 종사하자 신자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즉위하여 대왕대비 김씨(영조의 왕비)가 후견하게 되자 천주교에 대하여 혹독한 박해를 가하여 무수한 신자가 잡혀 죽었다. 【신유사옥】 이승훈을 비롯하여 이가환·정약종·황사영 등 남인 명사는 다 목숨을 빼앗기고 그들의 가족과 인척으로서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신부 주문모도 자수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이 순조 원년 신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신유사옥이라 한다.

그러나 금하면 금할수록 더 커지는 조선의 천주교는 그 후 헌종 2년(국기 4169년, 서기 1836년)에 세 사람의 서양인 신부 즉 정아각백(鄭牙各伯)·나백다록(羅伯多祿)·범세향(范世享)을 처음으로 맞이하였다. 【기해사옥】 헌종 5년 기해년에 이것이 발각되어 신부 3인과 교도 30여 명이 잡혀 죽게 되었으니 이를 기해사옥이라 한다.

이 해에 조정에서는 서교를 철저히 금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을 마련하여 일반에서 실행하게 하였다. 이는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여 자치적으로 천주교를 금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교세가 매우 쇠하였으나 그 후 교인들은 숨어서 활동을 하고 또 서양인 신부도 몰래 들어와서 김대건이라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헌종 12년 병오년에 김대건은 잡혀서 죽고 말았다. 다음 철종 때에 금령이 좀 늦추어지자 교인의 수가 다시 급속도로 늘고 많은 서교의 교사도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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