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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후기(국기 4058-4243년, 영조 원년-순종 말)
  • 제3장 세도정치와 홍경래의 난
  • 2. 홍경래의 난

2. 홍경래의 난

이때 평안도 용강 땅에 홍경래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종래 평안도 사람은 높은 자리에 쓰지 않음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김씨 세도 아래 관리의 노략질이 심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수 없음을 보고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우군칙, 김창시 등과 더불어 반란을 꾀할 새 동지를 모으고 군기를 만들더니 마침내 순조 11년 12월에(국기 4144년, 서기 1811년) 군사를 일으켰다.

【홍경래의 거병】 김씨 세도판인 조정을 미워하는 평안도 민중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고 또 홍경래의 용병은 날래어 가산, 선천을 빼앗고 청천강 이북을 호령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정주성에 웅거하였다. 조정은 이 소식에 크게 놀라 이요헌을 양서 순무사로 삼고 선봉장 박기풍·유후원 등을 앞뒤로 보내어 치게 하였다. 정주성이 험고하여 잘 함락되지 않자 관군은 4월에 이르러 한 계교를 내어 땅속으로 굴을 파고 성 밑에 다다라 화약을 묻어 폭파하니 성이 비로소 함락되고 홍경래도 전사하여 이에 난이 평정되었다. 이 홍경래 난은 곧 그때 백성의 뜻이었으니 민중은 대개 세도정치의 부패에 대하여 큰 불평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간에 이러한 큰 난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척 사이에는 또 세도의 싸움이 일어났으니 즉 다음 왕 헌종 때에 김씨와 조씨와 반목이 심해졌다. 조씨는 즉 헌종의 장인인 조만영의 일족으로 헌종 즉위 후 김씨와 세력을 다투다가 마침내 김씨의 세도를 빼앗았다. 【조만영의 세도】 조씨의 세력도 한때 장하였으나 헌종이 돌아가고 철종이 즉위하자 도로 그 세도가 김씨에게로 넘어갔다. 【김문근의 세도】 그것은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살아있는 동안 후견하고 그의 가까운 일족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삼아 그 일족이 권세를 잡게 되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외척의 세도가 자주 뒤바뀌는 사이에 나라의 정치는 자꾸 병들어가고 민심은 나날이 동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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