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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세의 후기(국기 4058-4243년, 영조 원년-순종 말)
  • 제4장 삼정의 문란과 민중의 동요
  • 2. 민중의 동요

2. 민중의 동요

【진주 민요】 그리하여 관리의 탐학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철종 13년(국기 4195년, 서기 1862년)에 진주의 민요로서 폭발되어 경상, 충청, 전라의 삼남 전체에 뻗고 기타 함흥, 제주도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특히 진주민란은 모든 민란의 앞잡이가 될 만큼 가장 맹렬하였다. 즉 이 해 2월에 민중은 병사 백낙신의 탐학에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들고 일어나 장관을 내쫒고 사람을 죽이고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죽창을 들고 성 안으로 모여들어 기세가 매우 놀라웠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삼도 안핵사로 삼아 그곳에 보내어 실정을 조사하게 하고 민란을 안무시켰다.

민란의 원인은 제도의 결함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제도를 나쁘게 운용하는 관리와 또 그런 관리를 내보내는 어지러운 조정에 더 있었으니 이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불평은 실상 오래전부터 있었다.

위로는 특권계급의 부패, 아래로는 피착취계급의 동요, 밖으로는 서양세력의 동점, 안으로는 정치의 문란 등 이때야 말로 큰 변동, 큰 개혁이 있어야 될 때였다.

【최제우의 동학】 철종 연간에 경주에 최제우라는 이가 있어 사상에 의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종래 조선 사람이 믿어오던 천신 사상 기도 의식에 유·불·선 삼교의 사상 내지 약간의 도참(예언)적 요소를 가미하여 이름을 동학이라 하고 광제 창생을 민중에 향하여 부르짖었다.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반대적 입장을 표시한 이름으로 겉으로는 서학을 배척하나 실상은 그것의 자극과 영향을 입은 바가 많았다.

동학 교문의 선전에 의하여 민중의 귀의와 움직임이 날로 늘고 커지게 되었다. 그 교문에 모여드는 민중은 대개 특권계급에 눌려 지내던 불평 많은 사람들이라 관인이 이를 겁내고 미워하더니, 【최제우의 사형】 철종 말년(국기 4196년, 서기 1863년) 최제우는 마침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혹세무민의 무리라 하여 잡혀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았다. 동학 교문의 운동은 이와 같이 대탄압을 입어 교도들은 풍비박산으로 흩어져 산골짜기에서 산골짜기로 숨어 다니며 여맥을 보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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