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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후기(국기 4058-4243년, 영조 원년-순종 말)
  • 제7장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1. 임오군란

1. 임오군란

【구식 군인들의 불평】 개화의 바람이 군제에 불어 구식 영문(營門)을 폐하고 새로운 영문을 두어 신식 군대를 훈련시키자 업을 잃은 구식 군인들의 민씨에 대한 불평은 자못 컸고 게다가 그들은 급료를 여러 달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종 19년 임오년 6월에 그들에게 밀린 급료 중 겨우 1개월분을 채워 주었는데 쌀의 품질이 좋지 못하고[모래가 섞였다고 전함] 수량도 대단히 부족하였다. 구식 군인들은 노기가 충천하여 창고 아전과 말다툼을 하다가 일이 벌어져 그 중 몇 사람이 잡혀 갇히게 되었다. 【구식 군인들의 반란】 군인들은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억울함을 애소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더욱 격분하여 드디어 일제히 난을 일으키니 민씨를 원수처럼 대하던 대원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뒤에서 은근히 부채질 하였다.

【일본 공사의 도망】 그리하여 반란군은 군기고로 몰려가 군기를 꺼내어 민씨네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신식교련관 굴본예조(호리모토 레이조)를 죽이고 또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공사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모토)은 인천으로 도망하여 영국 측량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민비의 피난】 반란군은 이튿날 다시 몰려 대궐을 범하여 궐내에 숨었던 민겸호 등을 타살하고 장차 민비를 시해하려 하니 민비는 변복하고 궁을 나와 충주로 난을 피하였다.

【대원군의 재기】 대원군은 이 변을 듣고 곧 입궐하여 반란군을 진무하고 왕명에 의하여 시국을 수습하는 중책을 맡으니 10년간 세도를 잃었던 대원군은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되고 따라서 문무 요인들의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민씨당은 이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그들의 책동은 매우 기민하여 이때 천진에 가 있던 김윤식 등에게 기별하여 청국의 원조를 청하였다. 【청나라의 내원(來援)】 청국은 이때 조선의 내정을 간섭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터이라 오장경, 마건충, 정여창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대원군을 잡아가고 조선 정치에 간섭의 손을 대는 한편 밖으로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방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제물포 조약】 일본 공사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모토)은 군함을 타고 와서 앞서 군란의 책임을 질문하여 드디어 제물포 조약을 맺고 배상금 50만 냥을 물리고 반란군의 괴수를 죽이고 또 수신사 박영효를 보내어 사과의 뜻을 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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