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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동학 교문의 운동과 동학란

1. 동학 교문의 운동과 동학란

앞서 수운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교는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의 공명을 얻어 최제우의 사후에도 자꾸 퍼져 마침내 큰 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제2대 교주 최시형】 즉 이때까지 숨어가며 힘을 모아오던 그들은 제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여 그 운동을 차츰 표면에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표면화 운동이 시작되자 교세는 삼남 즉 경상·전라·충청을 위시하여 강원·황해·평안도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교조 신원 운동】 이리하여 고종 29년 임진년에 해월 최시형은 충청북도 보은을 중심지로 하여 각처의 교도를 모아놓고 교주 최제우의 원한을 풀자는 의논을 결정한 후 긴 상서문을 정부에 올렸다. 그 이듬해 즉 계사년에도 교도 박광호 등의 주창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이르러 탄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헛되이 퇴각 당하였다.

관리와 토호의 행패가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참고 참던 민중은 이 동학 교문 운동에 자극되었다. 고종 27년부터는 민요가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 수령을 내쫒고 관아에 불을 지르며 납세를 거부하였다. 교주 신원 운동에 실패하고 보은으로 돌아온 동학교도는 그 수가 날로 불고 그 형세가 장차 불온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어윤중을 선무사로 보내어 그 교도를 타일러 헤쳐 보내게 하였다. 교도들은 선무사의 설유를 듣고 한때 해산하였으나 그들의 불평은 식을 줄 몰랐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떠한 기틀로 그들의 단체행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또 이때 일반 민심도 지방관의 착취로 말미암아 극도로 동요되어 마치 불덩이를 안은 것 같은 형편이었다.

【조병갑(趙秉甲)의 사욕】 이때 마침 전라도 고부 군수로 있던 조병갑이 고종 31년 갑오년에 만석보라는 「물보」를 수리하며 수만의 인부를 부리고 그 봇물을 받는 사람에게서 수세를 받아 혼자 제 배만 채우니 이에 백성들은 분노하여 마침내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全琫準)의 거병】 그 무리 중에는 동학교도가 많아 전봉준이라는 이를 괴수로 삼아 교도와 군민이 합하여 고부의 군기고를 점령하고 난을 일으키니 군수 조병갑은 이미 도망하였다. 이것이 곧 동학란의 시초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는 군대를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고부 백산 싸움에서 크게 지고 그의 영병관 이경호는 전사하였다. 【전주 함락】 이에 정부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하여 관군을 이끌고 치게 하였으나 첫 싸움에 또한 이롭지 못하였다. 이에 기세를 올린 동학군은 정읍, 태인, 금구를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를 함락시키고 말았다.

이 전주 점령 당시는 동학군이 가장 위세를 떨친 때니 전라도는 거의 그들 손에 들어갔다. 경기, 충청, 경상 등 여러 도의 교도들도 서로 응하여 관장을 죽이고 혹은 내쫓으며 창고를 약탈하는 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초토사 홍계훈은 전봉준의 뒤를 쫓아 전주의 성 밖에 다다라 맹렬한 포격을 시작하여 동학군의 사기를 차차 저하시킨 후 귀순, 해산하라는 선유를 내렸다. 전봉준 측에서 보면 관군에 대한 항전이라면 더 버틸 수도 있었지만 청병이 와서 도와준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를 잃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초토사의 선유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퇴각하겠다는 뜻을 전한 후 전주부에서 철수하여 물러났다.

【전봉준의 재봉기】 그러나 전봉준은 그 무리를 해산하지 않고 재봉기의 기회를 엿보다가 그 해(갑오년) 6월에 전주에서 다시 일어나 공주 등지를 범하였다. 이에 관군이 또 내려와 여러 곳에서 격전을 거듭한 끝에 전봉준을 잡아 서울로 보내 이듬해 사형에 처하니 그 무리도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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