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 국사교본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후기(국기 4058-4243년, 영조 원년-순종 말)
  • 제9장 갑오경장과 나라의 새로운 체제
  • 1. 갑오경장

1. 갑오경장

【개화당의 조각(組閣)】 청일전쟁이 터지자 형세가 이롭지 못함을 안 원세개는 가만히 귀국하여 버리니 수구당의 세력이 수그러지게 되었다. 이때 개화당의 일파는 다시 대원군을 받들고 일어나 모든 수구당을 몰아낸 뒤 김홍집을 수반으로 혁신 내각을 세웠다.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버리고 그 종주권을 부인하며 개국 기년을 쓰는 등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관제 개혁】 그들은 먼저 관제를 개혁하여 궁내부와 의정부의 2부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무의 8아문을 두어 다시 내정의 개조에 착수하였다. 칙령으로 과부의 재혼을 허하였으며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없앴으며 노비 매매를 금하고 천민을 학대에서 해방하였으니 이를 갑오경장이라 부른다. 이 칙명은 일반 백성에게는 대단히 호감을 주었으나 완고한 양반들은 퍽 좋아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하순에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새로 전권 대사가 되어서 대원군이 동학당을 부채질한 것을 나무랐다. 부득이 대원군은 다시 은퇴하고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서광범 등을 넣어 온전히 개혁당(개화당)으로만 내각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 내각의 수상은 김홍집이다.

【하관(시모노세키) 조약】 그동안 청일전쟁은 아산만과 성환과 평양전에서 청군이 대패하고 그 뒤 여순과 위해위가 함락되자 청국은 화의를 제출하여 이홍장과 이등박문이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맺고 싸움을 끝냈다. 그 조약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완전히 승인하고 청국은 요동반도를 일본에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요동 반도를 가지면 동양 평화 교란의 화근이 된다 하여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의 위압적 간섭으로 도로 청국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약함을 알고 친러시아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친러파 조각】 이때 마침 박영효 일파가 반역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자 친일파의 개혁당을 일소하고 친로파를 중용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서게 되었다.

【을미사변】 이에 분개한 개혁당은 일본 낭인들과 더불어 숨어있는 대원군을 움직이게 하여 【민비 시해】 고종 32년 을미년(국기 4228년, 서기 1895년) 8월 20일 새벽에 경복궁에 들어가 왕에게 청하여 친러파를 내쫓고 왕비 민씨를 죽이니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이 정변이 있은 뒤 새 내각에서는 모든 개혁에 손을 대었다. 이듬해 음력 대신 양력을 쓰고 종두법을 시행하며 우편을 개시하고 건양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또 단발령을 내리고 왕이 먼저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민비의 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므로 친위대의 태반을 지방에 보내어 민란을 토평하게 하였다.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는 이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러시아 수병 100명을 인천으로부터 입경시켜 【아관파천】 이 해 2월에 왕과 왕세자를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어 이른바「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수상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경복궁으로 달려가다가 민중에게 맞아죽고 탁지부 대신 어윤중도 향리로 가는 도중에 맞아죽었으며 그 밖의 대신들은 모두 일본으로 망명하니 조선은 온전히 친러파의 독차지가 되었다.

【대한 국호】 왕은 1년 뒤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들어가 연호를 광무로 갈고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였으며, 그 해 10월 12일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국기 4230년, 서기 1897년) 개혁이 되자 새로운 공기가 넘치기 시작하여 종로 네거리에는 수만의 군중을 모아서 정부를 공격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립협회 설립】 이들은 앞서 건양 원년 가을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의 투사들이었다. 국문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지난날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등 차차로 자주적 기세를 보이게 되었다. 【황국협회의 대립】 독립협회는 모든 것을 통하여 현 정부를 배척하므로 정부에서는 홍종우, 이기동 등을 시켜 황국협회라는 것을 조직하게 하여 독립협회를 누르고자 8도에 행상하는 보부상(대조직체 상인단) 수천 명을 끌어들여 서대문에서 독립협회와 충돌하게 하니 양쪽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흥분한 민중은 이기동 외에 대관들의 집을 쳐부수고 소동을 일으키니 마침내 황제는 내각을 갈게 하고 대궐문에 나서서 유신을 직접 약속하여 대중을 흩어지게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