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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한국의 마지막

【헤이그 밀사 사건】 보호조약이 맺어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분사한 이와 혹은 의병을 일으켜 반항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한 사람도 있었고 그보다 이 딱한 사정을 국제 열강 앞에 호소하고 제때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광무 11년(국기 4239년, 서기 1907년) 6월에 화란의 서울「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려고 가만히 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몸에 품고 나타난 세 사람의 한국 밀사가 있었으니 그는 전 의정부 참찬 이상과 전 판사 이준,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이었다. 즉 이 세 사람은 그곳에 돌연히 나타나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의 밀서를 제출하고 회의에 참석하기를 요구하였다. 평화회의 의장은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외교권을 상실하였으니 참가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절을 하였다. 이에 밀사는 한국과 일본과 맺어진 보호조약은 전혀 일본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한국 황제의 참뜻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으나 역시 참석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준의 자살】 밀사는 어디까지라도 구주 열강의 여론을 일으켜 그 힘에 의하여 일본의 보호를 벗으려고 모모국 신문기자들을 움직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애써오던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되자 밀사의 한 사람인 이준은 의분에 못 이겨 가지고 있던 단도로 자기의 배를 갈라 스스로 죽고 말았다.

이 밀사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조야는 크게 놀라 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통하여 한국 정부에 질문을 발하였다. 고종은 일부러 그런 일이 없다 하였고 총리대신 이완용도 내각에서는 원래 알지 못하는 일이라 하여 될수록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다. 이등은 밀사 파견이 칙명에 의한 것이란 증거를 보이며 점점 강경한 태도로 임하니 정부 각 대신은 사태가 쉽지 않음을 알고 궐내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기도 하고 또는 연일 내각회의를 거듭하여 선후책을 강구한 결과 고종의 양위를 결행함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각 대신은 고종께 알현하고 양위의 부득이 함을 아뢰니 고종은 매우 노한 빛을 띠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왕위를 황태자(순종)에게 내리고 양위 반대파인 박영효·송태관을 제주도와 진도로 유배했다. 【고종의 퇴위】 광무 11년 7월 19일 양위의 조서가 내리니 인심은 극히 험악하여져서 그날 밤에 일진회의 신문사가 부서지고 전동의 시위대병이 나와 일본인을 습격하고 격분한 민중은 이곳저곳에서 일본 사람과 충돌하였다.

이 해 8월 2일에 광무 연호를 융희로 고치고 27일에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실제 양위는 7월 20일이었으며 그 후 4일에 일본과 새 협약을 맺고 이어 전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군대 해산】 8월 1일에 군대 해산식이 훈련원에서 거행되자 서소문 내 병영에 있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대장 박성환이 자살하였다. 이에 소동이 일어나 제2연대가 이에 응하여 일본 군대와 한참동안 교전하다가 겨우 진정되었다. 그러나 해산을 당한 서울과 지방의 군인들은 전일의 의병과 합류하여 지방 이곳저곳에서 소란을 일으켜 5년 동안이나 계속 저항하였다.

그 뒤 정세는 날로 급전되어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융희 2년 2월에는 외교고문 미국인 수지분(須知分)이 귀국하여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보호정치에 대한 찬사를 신문에 썼다가 재류 한인 전명운과 장인환에게 권총으로 사살을 당하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듬해 10월 26일에는 전 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러시아 장상 「코코프체프」와 만나려고「하얼빈」에 도착하였을 때 역전에서 우리의 의사(신천 사람)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 즉사하고 안중근은 잡혀 이듬해 2월 7일 여순에서 32세를 일기로 교수대 위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거사는 실로 의로워 세인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다.

융희 3년 12월에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일본과 합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정부에 건백하였다가 대한협회, 흥사단 등의 궐기로 형세가 험해지더니 통감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양편에게 의견의 발표를 일절 못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이완용은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거행된 백이의 황제의 추도식에 갔다가 나올 때에 문 앞에서 평양 사람 이재명이라는 23세의 청년에게 칼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이재명은 재판 후 사형에 처해졌다.

【한일 합병】 이듬해 8월 21일에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 사이에 비밀히 진행하던 한일합병안이 성립되어 어전회의를 거쳐 8월 29일에 조약이 발표되고 조서를 내리니 조선은 태조 건국으로부터 27세 519년 만에 나라를 잃고 우리 반도강산은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되어 갖은 압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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