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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째 가름 삼국의 흥망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첫째 조각 삼국은 어떻게 건국하였으며 어떻게 융성하였는가?
  • ③ 고구려는 어떻게 강성하였으며 그 국민성은 어떠하였는가?

③ 고구려는 어떻게 강성하였으며 그 국민성은 어떠하였는가?

고구려 발상지 압록강 유역에는 높은 산과 깊은 골이 많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산물이 많이 나지 아니하므로 그들은 분투와 절약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주위에는 강적이 많으므로 자연히 무를 숭상하고 용맹을 좋아하여 백절불굴의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활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태조대왕 이후 서진(西進) 정책을 취하여 요동, 현도, 낙랑 등 한의 군현을 공격하다가 산상왕 때에 요동 태수 공손씨, 동천왕 때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 고국원왕 때에 선비족 모용씨[前燕]의 침입을 받아 세 번이나 서울[국내위나암성과 환도성 즉 국내성]이 함락되어 큰 욕을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천왕 때에 낙랑, 대방을 격멸하여 400여 년간 반도 일각에 뿌리를 박고 있던 한족의 세력을 몰아내고 광개토왕 때에 요동, 현도를 점령하여 건국 이래 수백 년간의 현안이던 서진 정책을 완수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방을 점령하였다. 다음 장수왕 때에 서울을 평양으로 이전하고(단기 2760년, 427년) 다시 백제를 쳐서 백제의 서울 한산성(漢山城)을 함락하고 영토를 조령 및 죽령까지 확장하였으며, 그 다음 문자명왕 때에 부여를 합병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 3대 130년간이 전성 시기로서 그 영토가 동쪽은 바다에, 남쪽은 아산만·천안·조령·죽령, 서쪽은 금주성(錦州省)·조양(朝陽), 북쪽은 장춘(長春) 부근까지 이르러 극동의 제일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 후 양원왕 때에 신라, 백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영양왕 때에 수 양제의 백만 대군을 맞이하여 을지문덕이 살수[지금 청천강]에서 적을 대파하고 보장왕 초년에 당 태종의 대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여 고구려 남아의 기개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고구려 왕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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