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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째 가름 신라·발해의 성쇠와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첫째 조각 신라 발해는 어떻게 융성하였는가?
  • ④ 신라 전성 시기의 서울 안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④ 신라 전성 시기의 서울 안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신라는 통일 이후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산업과 문화가 일어남에 따라 서울 경주가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의 귀족들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한 까닭에 경주는 더욱 번창하여, 대궁·양궁·사량궁·임해전·포석정 등 궁전과 황룡사·분황사·사천왕사·봉성사·봉은사·봉덕사·영흥사·불국사 등 대가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귀족과 부자의 저택인 35금입택과 그들의 별장인 사절유택 등 화려한 건물이 즐비하며, 동·서·남 3시전에는 물화의 매매가 매우 풍성하였다. 전성 시기의 경주에는 6부 55리 1360방에 178,936호가 있었다 하며, 49대 헌강왕 시대에는 성내에 초가가 하나도 없고 기와집이 즐비하며 집집마다 숯으로 밥을 지었다 하며, 노래와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경주가 얼마나 크고 화려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동시에 6부 귀족의 생활이 얼마나 호화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 안일, 환락 생활은 스스로 타성을 길러내어 내부가 차차 부패하게 되었다.

 [익힘]

1. 경덕왕 시대에 관명·지명을 어떻게 개정하였는가?

2. 경주 서울의 번창은 신라 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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