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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째 가름 고려조의 변천은 어떠하였으며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첫째 조각 초기[태조─정종]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④ 강조와 하공진은 어떻게 거란에게 항사(抗死)하였는가?

④ 강조와 하공진은 어떻게 거란에게 항사(抗死)하였는가?

고려는 거란과 화친한 뒤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해마다 사신과 예물을 교환하였으나 마음으로 거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종 다음 목종 때에 왕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태후의 외족 김치양이 정권을 잡고 정치를 어지럽게 하므로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일어나 간신을 일소하고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게 되자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현종 원년(단기 3343년, 1010년)에 친히 40만 대병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그는 강조의 방어군을 통주[선천]에서 격파하고 강조를 잡아 거란의 신하되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강조는“나는 고려 사람이다.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고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항거하다 죽었다. 이에 거란 주는 군사를 몰아 개경으로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을 마음대로 행하여 개경은 쑥밭이 되어 궁궐 부고와 민가가 전부 다 타버리고 역대의 전적도 모두 소실하였다.

이보다 앞서 현종은 남쪽의 나주로 피난하였는데, 도중에서 개경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근신 하공진을 파견하여 강화를 청하였다. 거란 주는 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승낙하고 하공진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러나 왕의 친조는 실행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현종은 다만 사신을 보내서 철병을 사례할 뿐이었다. 하공진은 그곳에서 거란 주의 우대를 받았으나, 고국을 그리워하여 도망하다가 잡혀서 강조와 같은 항변을 하고 의로운 죽음을 당하였다. 강조와 하공진의 항사는 민족의식이 왕성한 고려인의 기백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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