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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째 가름 고려조의 변천은 어떠하였으며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둘째 조각 중기[문종─원종]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① 동·서 여진과의 관계는 어떠하였으며 윤관은 어떻게 여진을 정벌하였는가?

① 동·서 여진과의 관계는 어떠하였으며 윤관은 어떻게 여진을 정벌하였는가?

여진은 발해 유민 중의 말갈이 변칭한 이름이며 후일 만주족의 조상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북만으로부터 반도 북부 압록강 유역과 함경도 정평까지 거주하였으며 아무 통제도 없이 여러 부족으로 분열하여 있었다. 고려에서는 함경도 지방에 있는 것을 동여진 혹은 동번이라 하고 압록강 유역에 있는 것을 서여진 혹은 서번이라 하였다. 그들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기고 사절을 보내서 모피와 기타 토산물을 바치고 작물과 공예품을 받아 갔으나, 이익이 적으면 고려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특히 현종 이후 더욱 심하였으므로 고려는 이들과 거란을 방어하기 위하여 덕종·정종 양대 간에 압록강 입구로부터 의주·운산·희천·영원을 거쳐 낭림산맥을 넘어 동해안 정평의 도련포까지 전장 천리의 장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여진을 방어하는 동시에 그들을 회유하여 문종 조에는 고려의 세력이 함흥 지방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선종 때에 북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 있던 여진 완아부의 추장 영가[금나라 목종]와 그 아들 오아속[금나라 강종]이 나타나 차차 여진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고 숙종 때에 그 세력이 함흥 지방까지 미쳐 고려와 여러 번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의 명장 윤관은 신기, 신보 등 별무반을 조직하여 먼저 군대를 양성하고 예종 2년(단기 3440년, 1107년)에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을 정벌하여 지금의 함흥 북청 지방을 소탕하고 그곳에 9성을 쌓아 남쪽 사람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오아속은 9성을 침략하거나 혹은 사절을 보내서 되돌려달라고 애걸하므로 고려는 드디어 9성을 되돌려주고 그 대신 오아속은 고려에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 9성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險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통태진(通泰鎭)이다. 함주가 함흥인 것은 명백하나 기타는 잘 밝혀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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