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 우리나라의 생활
  • 여섯째 가름 고려조의 변천은 어떠하였으며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둘째 조각 중기[문종─원종]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③ 귀족은 어떻게 발호하였으며 그 변란은 어떠하였는가?

③ 귀족은 어떻게 발호하였으며 그 변란은 어떠하였는가?

고려는 건국 이후 거란·여진의 외환이 잦았던 까닭에 국민은 모두 일치단결하여 외적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예종 때에 금과의 국교를 조절하여 외환이 없어지게 되자 귀족과 권신이 발호하여 내란이 자주 일어났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인종조의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의종조의 정중부의 난 등이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로서 누대 왕실과 외척 관계를 맺고 있던 당시 제일의 귀족이다. 그는 그의 두 딸을 정비와 차비로 왕에게 바치고 그의 족속과 당파를 요직에 앉히고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조정에서 몰아내어 마음대로 권세를 누렸다. 그래도 부족하여 왕의 자리를 노리고 인종 4년(단기 3459년, 1126년)에 난을 일으켜 왕궁을 침범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양가서 죽게 되었다. 이 변란으로 왕궁이 전부 소실되었다.

이때 서경의 중으로 음양 술수에 통한 묘청이 서경 출신의 일관 백수한·문인 정지상 등과 더불어 “중경은 지덕이 쇠하고 서경은 왕기가 왕성하니 이곳으로 서울을 옮기면 내란이 없어지고 금나라 이하 36국이 내조한다” 하고 왕에게 서경으로 천도하여 우리나라도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우자고 하였다. 인종도 이에 귀를 기울여 5년에 서경에 가서 지리풍수상 유명한 임원역[평양 북쪽 30리]에 신궁을 지어 대화궁이라 하였다. 묘청이 칭제 건원하자는 것은 자주 사상을 고취하는데 큰 의의가 있고 서경 천도는 부패한 인심을 씻어버리는데 가장 효력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음양 술수로 인심을 현혹하고 자기들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이와 같은 계획을 세웠으므로 개성 중심의 귀족이요, 사대사상에 젖은 유학자 김부식 등의 반대로 묘청의 서경 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에 묘청은 격분하여 인종 13년에 서경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의 정벌을 받아 대위국은 1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 왕계 (2)]

확대보기
[고려 왕계 (2)]
[고려 왕계 (2)]
팝업창 닫기

 [익힘]

1. 이자겸의 난은 어떠한 것인가?

2. 묘청의 난은 어떠한 의의를 가졌는가?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