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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째 가름 고려조의 변천은 어떠하였으며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셋째 조각 후기[충렬왕─공양왕]의 나라 안 모양과 외국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 ② 몽고와 강화한 후의 관계와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② 몽고와 강화한 후의 관계와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고려는 몽고[원]와 강화한 뒤 자비령·철령 이북 지방과 제주도를 잃어버리고, 원나라의 무한한 압제를 받고 지내었다. 자비령 이북 지방은 충렬왕 때에 도로 찾았으나 철령 이북 쌍성[영흥] 지방과 제주도는 공민왕 때까지 99년 간 원나라에 빼앗겼다.

원나라는 정동행성을 개경에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고 충렬왕으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대대의 고려 국왕을 원나라 황제의 사위로 삼았다. 국왕을 본국보다 원나라 서울 대도[북경]에 더 많이 있게 하고 세자와 왕자는 반드시 원나라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그러므로 신하와 그 하인들이 많이 대도로 들어가게 되어 한때에는 대도에 고려인 3만여 명이 있었다 한다. 따라서 고려 사람은 몽고말을 잘하게 되고, 몽고식 성명을 지어서 쓴 사람도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말 가운데 몽고말이 흔히 섞여 있는 것은 이 까닭이다. 그리고 원나라는 고려 사람도 원나라 사람과 같은 의복을 입고 체두 변발[앞머리를 깎고 뒷머리를 땋는 것]을 시켜서 고려의 풍속이 크게 변경되었으며, 임금에 대한 칭호와 관제도 또한 많이 변경되었다.

【고려는 이제까지 왕호에 조·종이라 하는 존귀한 칭호를 사용하고 또 폐하·짐·조·태자 등의 존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원나라가 이것을 참람하다고 했기 때문에 충렬왕 이후 이것을 폐지하고 폐하를 전하, 짐을 고, 조를 교, 태자를 세자로 개칭하였다.】

 [고려 왕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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