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죽은 뒤 그 아들 우왕이 섰으나 공민왕 17년(단기 3701년, 1368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일어난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분열이 생겨 정권 다툼을 하기 여러 해였다.
결국 친명파가 승리하였으나 명 태조는 금은과 말 등 요구하는 물건이 매우 많았다. 우왕 14년(단기 3721년, 1388년)에는 압록강 연안에 철령위를 건설하고 우리나라를 압박하려고 하므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영이 크게 분개하여 명나라를 처서 동명고강을 회복하기로 하고 조민수와 이성계 두 장수로 하여금 요동을 공략하게 하였다. 그러나 친명파의 거두인 이성계는 군사를 끌고 위화도[의주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까지 갔다가 조민수를 꾀어 요동 정벌을 중지하고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들어와 최영을 잡아서 죽이고 우왕을 폐하여 강화에 방치하고 그 아들 창왕을 세웠다. 이에 동명고강을 찾자는 고려의 국민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천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