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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첫째 조각 근세조선 전기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② 국도 문제는 어떠하였으며 한양의 서울은 어떻게 정하였는가?

② 국도 문제는 어떠하였으며 한양의 서울은 어떻게 정하였는가?

조국을 잃은 고려조의 옛 신하들의 무저항에도 적지 않은 불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 외에 풍수설로도 개성이 왕도로서 좋지 못하다는 말썽이 있었고 또 새 나라의 처음 인심을 한 번 새롭게 할 필요도 느끼고 하여 진작 천도 문제가 일어났다.

태조는 서울이 될 적당한 터를 고르기 위하여 친히 여러 신하를 데리고 계룡산·한양 등지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계룡산이 좋다 하여 거기에 터까지 닦다가 중도에 한양[지금 서울]으로 변경하여 신도 궁궐 조성 도감을 두고 종묘·사직·궁궐의 건축을 맡게 하였다. 태조 3년(단기 3727년, 1394년) 10월에 개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한성부라 일컬었으며 경복궁과 그밖에 묘·단을 짓고 수많은 민정을 불러다가 서울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 태조 5년에 서울의 구획을 정하니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으로 도합 52방이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정종 때에 와서 관료와 백성 중에 옛 수도를 사모하는 이가 많으므로 도로 서울을 개성으로 옮겼다가 태종 5년(단기 3738년, 1405년)에 또 다시 한양으로 옮겨 와서 오늘날까지 수도가 되어오는 터이다.

 [익힘]

1. 태조는 건국의 처음 어떠한 정책을 썼는가?

2.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3. 한양이 서울로서의 지리적 가치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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