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오랫동안 고려조에서 벼슬하였으므로 불교의 부패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즉위 처음부터 이의 혁신에 착수하는 반면에 그 사상의 전환을 유교에서 구하기로 하였다.
태조는 도첩의 제도를 정하여 승려가 되려는 자는 먼저 관청의 허가를 필요로 하고 그 허가를 받을 때 일정한 세를 바치게 하여 되도록 승려의 수를 제한하였다. 또 새로 사찰의 조성을 금하였고 이미 승려가 된 자일지라도 그 자격이 없는 자는 환속시켰다.
태종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중앙과 지방의 사찰을 크게 정리하여 종(宗)은 12, 절은 232에 제한하는 동시에 사찰 소속의 토지와 노비는 대부분 관에 몰수하였다. 다음 세종대왕은 이 방침을 한층 더 철저히 하여 12종을 선종·교종 둘로 줄이고 절은 겨우 36사의 본산에 감축시켰다.
유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오래였으나 그렇게 떨치지 못하였다가 고려 중기 이후부터 차차로 발전하여 오게 되었으며 유학의 일파인 주자학은 그 학설 안에 많이 배불사상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불교가 부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주자학이 국가 사회에 보급되는 데는 좋은 구실과 조건을 얻게 되었다.
국초에 활약하고 또 중요 지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번 벽불론을 올리고 유교의 장점을 칭찬하였고 또한 정책상으로도 필요하였기 때문에 배불 숭유로 전환한 것이었다.
배불 정책을 쓴 뒤에 불교가 곧 여지없이 쇠퇴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침투되었던 신앙이 이로 인하여 쉽사리 식어질 리는 만무하였다. 그리하여 태조·세종·세조 등 역대 임금도 개인적으로는 깊이 불교를 믿어 사원의 창건, 불경의 간행 등 불교사상에 허다한 공적을 남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방침이 한번 정하여진 이상 이 뒤에 비록 다소의 신축은 있을지언정 전일과 같은 융성은 보지 못하였으므로 명종 때에 승려 보우가 나서서 이의 부흥을 도모하려 하다가 실패하였다. 선조 때에 휴정과 유정 등의 활동으로 한동안 적잖이 떨치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길이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 뒤에는 완전히 정치적으로 혜택을 입지 못하고 오직 일반 민중의 시사를 상대로 겨우 명맥을 보전하여 왔다.
[익힘]
1. 역대 임금은 무슨 까닭으로 배불 숭유 정책을 쓰게 되었는가?
2. 배불 숭유 정책이 국가 사회에 미친 이해관계를 살펴보라.
3. 배불 정책 후의 불교의 추이는 어떠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