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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셋째 조각 근세조선 중기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④ 의병은 어떻게 활동하였으며 명군의 내원과 육전의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④ 의병은 어떻게 활동하였으며 명군의 내원과 육전의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조국의 위험함을 본 민중들은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벌떼같이 일어났으니 곽재우·조헌·고경명·김천일·정인홍·정문부 같은 선비들과 휴정·유정·영규 같은 승려들이다. 이들은 수천 명 적으면 수백 명씩 한 떼가 되어 혹은 육탄으로 장렬하게 싸워 죽기도 하고 혹은 관군을 도와 싸우기도 하며 혹은 산병전(散兵戰)으로 적군을 괴롭게 하고 혹은 관군의 군량을 대어 주기도 하였다. 혹은 통신 운반을 담당하기도 하여 그 활동이 오히려 관군을 능가하여 도처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조정의 요청으로 명에서도 이여송 이하 수많은 장병이 내원하여 평양성을 회복하였다.(선조 26년 1월) 정문부는 가등청정을 쫓고 함경도를 도로 찾으며, 이정암은 연안에서 크게 이기고, 권율은 행주에서 적군을 크게 깨뜨리며, 김시민은 진주에서 적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다. 이에 싸움 판국이 차차로 우리에게 유리하여 갔다.

이때 명나라 사람 심유경이 화의를 제창하자 적군은 모든 방면에 걸쳐 그들이 불리한 경우에 처하여 있음을 알고 할 수 없이 이에 응하고 서울에서 철퇴하였다. 이어서 명군이 입성하고 연달아 적군의 뒤를 쫓으니 적군은 남쪽 해변에 진을 치고 화의와 전쟁 두 길을 취하여 전년에 실패한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에 우리의 용장 김천일·황진·최경회 이하 관민이 8주야를 두고 비장한 혈전을 계속하였지만 6월에 성이 함락되어 6만 관민이 장렬한 죽음을 하여 민족의 혼을 보였다.

 [익힘]

1. 의병은 조국의 위급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활동하였는가?

2. 진주성 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그 느낀 바를 말하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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