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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⑤ 정유의 두 번째 난리는 어째서 일어났으며 육전의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⑤ 정유의 두 번째 난리는 어째서 일어났으며 육전의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명의 심유경이 제창한 화의에 대해 우리 조정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에서는 이를 추진시켜 명과 일본과의 사이에 4년 동안을 허비하다가 분수를 모르는 풍신수길의 일곱 가지 요구로 말미암아 화의는 그만 결렬되고 말았다. 선조 30년 정유년(단기 3930년, 1597년) 정월에 소서행장·가등청정 등 14만 적군이 다시 침입하니, 이것이 곧 정유년 두 번째 난리이다.

이번 싸움은 주로 앞날 적군이 쌓아둔 성을 중심으로 남쪽 지방에서 계속 되었다. 그들은 이순신이 그대로 통제사로 있게 될 경우에는 이번 싸움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므로 작년 가을부터 이순신을 현직에서 몰아낼 모략을 썼다. 한편 조정에서도 당쟁 기타에 관련하여 마침내 이순신을 경옥(京獄)에 붙잡아 가두고 원균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가 정유년 7월에 원균이 적군에게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고 이어서 영남과 호남 지방의 요소인 황석산성과 남원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 동안 명에서 또다시 원군이 와서 성주·충주·전주·남원 등지를 지키다가 남원의 패전과 함께 한강으로 물러서더니 뒤이어 원군과 함께 9월에 적군과 직산의 소사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이것이 이 난 중 최초로 얻은 큰 승리이다. 이로 인해 적군은 그만 다시 남쪽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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