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 우리나라의 생활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셋째 조각 근세조선 중기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⑥ 두 번째 난리의 수전은 어떻게 활발하였으며 적군은 어째서 물러가게 되었는가?

⑥ 두 번째 난리의 수전은 어떻게 활발하였으며 적군은 어째서 물러가게 되었는가?

원균의 참패는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고 이순신은 이에 패잔 군함 12척을 거느리고 9월에 울돌목[진도]에서 지리와 조수를 공교하게 이용하여 적함 100여척 중 32척을 격파하고 적의 장병 수천 명을 죽였다. 이것이 유명한 울돌목의 큰 승리이며 적의 수군은 또다시 앞길이 막혔다.

한편 선·명 연합군은 직산 승전 후 네 길로 나누어 적군을 밀고 내려와 울산·사천·순천 등지에서 적병과 싸웠으나 승패가 상반이었지만 홀로 해군만은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 31년 무술년(단기 3931년, 1598년) 8월에 전쟁의 장본인인 풍신수길이 죽고 그의 유명으로 적군이 물러가려 한다는 것이 이순신에게 알려졌다. 이순신은 명나라 장군 진린의 수군과 연합하여 11월 행장의 도망하는 길을 끊으며 도진의홍(島津義弘)의 구원군을 노량[남해]에서 돌격하여 200여 척을 분쇄하였다. 그러나 원통하게도 이순신이 적의 탄환을 맞아 54세를 일기로 위대한 최후를 마쳤다.

이순신이 돌아간 뒤에 적군은 틈을 타서 달아나고 전국의 적이 수습되자 명의 장병도 차차로 돌아가고 전후 7년이나 끌어오던 싸움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익힘]

1. 정유의 두 번째 난리가 일어난 까닭을 말하여 보라.

2. 이순신에 대하여 여러분의 느낀 바가 무엇인가?

3. 많은 희생을 받으면서 명군은 어째서 원조를 아끼지 아니하였는가?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