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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셋째 조각 근세조선 중기의 나라 안팎 모양은 어떠하였는가?
  • ⑦ 난 뒤의 나라 안 모양은 어떻게 비참하였으며 국가는 그 부흥에 어떻게 힘썼는가?

⑦ 난 뒤의 나라 안 모양은 어떻게 비참하였으며 국가는 그 부흥에 어떻게 힘썼는가?

7년 동안이나 이어진 장기 전쟁이었기 때문에 선·명·일 세 나라가 다 피폐하였을 것은 물론이고 그 중에도 우리나라가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 우리나라 가운데에서도 경상도가 더욱 우심하였다.

적군은 그 본색을 폭로하여 가는 곳마다 살인·방화·약탈을 감행함은 물론 무도하게도 왕릉까지도 발굴하였으며 팔도강산 그들의 발굽이 한 번 닫기만 하면 삽시간에 폐허가 되었다. 구원하러 온 명의 장병의 북새도 적지 않아 산업·경제·풍속·습관·문화·유물이 모두 파멸 또 파괴되었으며, 그 위에 전염병까지 크게 유행하여 그 참혹한 정경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한다.

선조는 서울에 돌아오자 즉시 나라의 부흥과 국민의 정신 환기에 힘써 왕이 친히 양미를 절약하고 또 용산 창고의 곡식을 내어 사선에서 방황하는 백성을 구하였다. 동시에 팔도의 부세를 탕감하며 전국에 명을 내려 숨은 인재를 널리 구하고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였다. 훈련도감을 두어 서울과 지방의 군대를 교련하며 무술의 장려와 국방에도 진력하였고, 또 궁궐을 수리하고 산실된 문헌을 다시 정리하여 문교에도 노력하였으므로 크나 큰 상처가 적이 풀려갔다. 이 뒤부터 자아를 인식하려는 학풍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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