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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⑧ 난 중에 일본이 가져간 우리 문화는 무엇이었으며 그들과는 어떻게 또다시 화친을 맺게 되었는가?

⑧ 난 중에 일본이 가져간 우리 문화는 무엇이었으며 그들과는 어떻게 또다시 화친을 맺게 되었는가?

임진왜란 중에 적군이 가져 간 문화가 매우 많았다. 그들은 산업 경제의 진흥, 미술 공예의 발달, 문장 학문의 진보 등 각 방면에 걸쳐 많은 도움을 받아 마침내 덕천 막부(德川幕府)의 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이었다.

그릇 굽는 공인, 두부 만드는 사람, 유명한 의술가 등이 많이 잡혀 가서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으며 강항·이진영·일요상인(日遙上人)도 붙잡혀가 그들의 문장·학술·종교계를 계몽하였다. 그들이 훔쳐간 수많은 활자와 진귀한 다수의 서적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 매우 많은데 그들이 뽐내는 소위 덕천 시대의 문화는 거의 다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오직 우리나라에 의지하여 살아오던 대마도는 이제 와서 우리나라를 등지고는 살 길이 없으므로 덕천막부를 통해서 진작부터 국교를 다시 열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쉽사리 이를 들어주지 않자 대마도는 임진란 때에 왕릉을 발굴한 범인과 그들에게 붙잡혀간 수천 명의 동포를 돌려보내며 끈덕지게 화친을 청하였다.

조선과 일본은 그 지리적 환경과 기타 사정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국교를 단절하고 지낼 수 없었음은 우리 삼국 시대 이래의 역사적 사실을 보아 명백하므로 당시 조정에서도 일본의 그 행위가 밉기는 하나 이 또한 과거의 경험과 현실의 사정을 짐작하여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선조 39년(단기 3939년, 1606년)에 마침내 일본과의 통교를 정식으로 허락하고 부산의 왜관을 다시 여니 이로부터 일본 명치유신 전까지 전후 12회나 통신사가 왕래하였으며 사신이 갈 때마다 그 호화로운 기세는 왜인으로 하여금 경탄해 마지않게 하였다. 그들의 온갖 아양과 성대한 대접은 그 나라의 풍속과 경제에까지도 큰 영향을 주어 때때로 말썽이 되어 왔던 것이었다.

 [익힘]

1. 난 뒤의 사회상은 어떠하였는가?

2. 임진왜란을 통하여 일본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3. 싸움 뒤 적국인 일본과 다시 통교할 수밖에 없던 사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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