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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⑩ 두 차례의 호란은 어째서 일어났으며 그 결말은 어떠하였으며 효종은 어떠한 계획을 하였는가?

⑩ 두 차례의 호란은 어째서 일어났으며 그 결말은 어떠하였으며 효종은 어떠한 계획을 하였는가?

광해군의 패륜 행위는 북인의 압박 아래 불평을 품고 있던 서인에게 좋은 구실을 주어 마침내 서인 쪽의 김류·이귀 등이 일어나서 광해군을 내쫓고 대신 인조를 세웠다. 이것이 곧 인조반정이란 것이며 동시에 수많은 북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인조 2년(단기 3957년, 1624년)에 평안 병사 이괄이 공보다 상이 적다는 이유로 난을 일으키자 왕은 한동안 공주로 피하였다가 장만·정충신 등이 잘 싸워 난을 평정하고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괄의 잔당이 후금에 가서 충동하여 후금의 태종은 모문룡을 없애서 조선과 명과의 관계를 끊을 양으로 3만 장병을 보내어 모문룡을 쫓고 이어 북쪽 여러 고을을 짓밟으며 평산까지 내려왔다. 왕은 한동안 강화도로 피란하였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형제의 의를 맹약하고 후금군을 철퇴시켰다.

후금 태종은 그의 세력이 더욱 확대되자 스스로 대청 황제라 일컫고 우리나라에 대하여 그 승인을 요구하며 앞날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두 파가 서로 논쟁하다가 결국 주전파가 이기게 되었다. 인조 14년 병자년(단기 3969년, 1636년) 12월에 청 태종이 친히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왕은 또다시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청군은 서울과 강화도[왕족이 피란한 곳]를 연달아 함락시키고 이어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는 엄동설한에 45일 동안을 고전하다가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주화파 최명길의 말을 듣고 이듬해 정월에 왕이 친히 청의 군문에 나아가서 화친을 청하니, 이것이 곧 병자호란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뒷날 효종]은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병자호란 뒤에 의주 부윤 임경업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가만히 명과 통하여 청을 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뒤에 봉림대군이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 사람이 곧 효종이다. 효종은 진작부터 청을 칠 계획을 세우고 여러 방면으로 상당한 준비를 하였으나 왕위에 있은 지 10년 만에 돌아가고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 효종 때에 부득이하여 청을 도와 두 번이나 흑룡강 방면의 나선[러시아]을 쳐서 크게 이기자 청의 장병들이 이르기를 "두 차례의 승리는 오로지 조선군의 힘이다." 하며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니 그때의 우리 군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익힘]

1. 광해군은 거북스러운 국제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2. 정묘·병자 두 호란의 일어난 원인을 살펴보라.

3. 효종의 북벌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는가를 연구하여 보라.

 [근세조선의 왕계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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