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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째 조각 당쟁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진전 및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 ② 당파 싸움은 갈수록 어떻게 어지러워졌는가?

② 당파 싸움은 갈수록 어떻게 어지러워졌는가?

동·서 두 당목이 생긴 뒤로는 온 조정 안이 두 파로 갈라져서 서로 배격하고 논쟁하게 되었다. 이이[율곡]는 이를 크게 근심하여 성심껏 조정에 힘썼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이가 돌아간 뒤에 그 폐단이 더욱 커져서 당쟁을 본위로 하는 정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선조 24년(단기 3924년, 1591년)에 동인 중에 이발과 우성전의 의견이 충돌하여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서 두 당목이 셋으로 늘어갔다.

광해군 15년 동안은 서인과 남인의 세력이 꺾이고 북인이 오로지 정권을 잡아 왕에게 도덕에 많이 어그러진 일을 저지르게 하였으며 북인이 또 나뉘어져서 대북·소북, 기타 여러 북(北)이 되어 서로 싸우며 당쟁은 갈수록 복잡하고 맹렬하여졌다.

이렇게 북인끼리 싸우는 동안 서인은 국면 전환에 크게 고심하다가 마침내 김류 등이 광해군을 들어내고 인조를 세웠다. 인조의 다음 임금 효종도 계속하여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신임하였으므로 서인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효종의 아들 현종 때에는 서인의 송시열·송준길과 남인의 허목 등이 예론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이후 약 35년간 승패를 되풀이하는 동안 숙종 6년 경신년 남인의 참패와 14년 서인의 실패 같은 큰 변동이 있었다.

숙종 9년에는 원로파 송시열과 소장파 윤증 사이의 의견 충돌로 다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이 생겨 서로 다투다가 신임사화[경종 때]를 일으켰다. 이 뒤부터는 당론은 대개 서인인 노·소론의 대립이었고, 이 남·북·노·소를 사색이라 불렀다.

 [당쟁의 계통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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