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로 썩어진 정치 밑에 민중은 의지할 곳이 없어 도리어 난리가 일어나서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용강 사람 홍경래가 가산을 근거지로 많은 당을 모아 서북 사람의 차별 대우를 타파하고 세도 대신을 몰아내어 도탄 속에 빠진 민중을 구하기 위하여 반항의 봉화를 높이 올리니, 때는 순조 11년(단기 4144년, 1811년) 12월이었다.
홍경래는 스스로 평서대원수가 되어 그가 군사를 일으킨 이유를 관서 일대에 돌리자 민중들은 사방에서 일어나 이에 응하여 가산·선천·박천 등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안주를 치며 정주성에 웅거하니 청천강 이북의 성읍이 대략 이에 가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크게 낭패하여 이요헌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이 견고하여 좀처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이듬해 4월에 이르러 땅 밑을 파고 화약을 폭발시켜 겨우 성을 깨뜨리고 홍경래를 죽였으니 5개월 만에 비로소 이 난리가 평정되었다.
이와 같이 민중의 반항 운동이 일어났으나 척신의 세도가 및 탐관오리의 비행이 조금도 그치지 않으므로 살 길을 잃은 민중들은 극도로 분개하여 도처에서 반항의 봉화불을 올렸다. 그 중에도 철종 13년(단기 4195년,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란이 가장 맹렬하였으며 그 밖에 함평·함흥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이는 다 홍경래 난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익힘]
1. 근세조선 말기의 사회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2. 특권 계급은 어떻게 횡포하였는가?
3. 홍경래는 무슨 까닭으로 난을 일으키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