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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일곱째 조각 근세조선의 문화 및 사회사정은 어떠하였는가? (풍속 부면은 최근세에 미루었음)
  • ③ 국가의 산업 정책은 어떠하였으며 외국과의 무역은 어떠한 모양이었는가?

③ 국가의 산업 정책은 어떠하였으며 외국과의 무역은 어떠한 모양이었는가?

조선은 농업을 나라의 기초로 삼았던 만큼 근세조선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태조는 그 즉위 처음에 역시 농본주의에 근본을 두어 먼저 전제를 정돈하고 그 밖에 농업의 장려, 토지의 개간, 호구의 증식에 주력하였으며 이 정책은 대대로 이어졌다.

역대의 여러 임금은 농사의 장려와 아울러 농민의 보호에 유의하여 혹은 못을 파고 혹은 둑을 쌓으며 혹은 경작을 지도하고 식량을 배급하였으며 농사·양잠·양우에 관한 서적을 알기 쉽게 만들어 일반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중에도 전기의 세종·성종, 후기의 영조·정조의 농정에 대한 공적이 가장 많았다.

특히 세종은 면업에 주력하여 종래 경기·충청·전라 3도에서만 재배하던 목화를 평안도에까지 보급하였으며 세조 때에는 면업이 더욱 발달하여 야인과 왜인까지도 이를 많이 가져갔다.

농산물 중 담배는 광해군 대에 일본을 거쳐 들어와서 수십 년이 되지 못하여 전국에 만연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금령을 내려 흡연과 그 종식(種植)을 금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고구마[감저]는 영조 때에 역시 일본으로부터 조엄이 가져와서 이광려·강필리 등과 같이 노력하여 전국에 퍼지게 하였고 감자[호감자, 마령서]는 순조 때에 두만강을 거쳐 북관에 들어왔다.

대외 무역은 명·청에 대하여 금·은·말·인삼·표피·모시·화문석·자기 등을 수출하고 명·청으로부터 채단·약품·서적을 수입하였으며 호인에 대해서는 경성·경원·회령 같은 무역소를 중심으로 그들에게 주로 피물을 받아들였고 금·은·삼·목화·농구·식기·종이·소·식료품 들을 주었다.

왜인과의 무역은 삼포를 거쳐 하게 되었다. 왜인에게 유황·소목[물감]·구리·은 등을 받고 우리나라에서는 면포삼·화문석·꿀·서적 등을 주었다. 유구국에서도 물감·호초·사탕·주석·상아·물소 등을 가지고 왔으며 멀리 섬라[타이]와 피램반(爪哇, 자바)으로부터도 종종 사신이 와서 무역하여 갔다.

국내 상업으로는 서울 안에 육의전이 있어 비단·면포·종이·미곡 그 밖에 여러 가지 물건을 궁중과 정부에 대어 주었다. 그곳에는 일반 민중이 소용하는 상품을 공급하는 작은 가게도 많이 있었다. 지방에도 여러 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그 수는 1052개에 달하며 이 밖에 춘추 2회 약재 전문 시장도 있었다.

광공업 중 광업은 주로 금은 캐기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명에 보내는 중요한 예물인 까닭이었다. 국내에 그 생산이 적으므로 한때는 왜인에게 파는 것을 금하면서 명의 예물에 충당하여 그 고심이 매우 컸다. 유황과 철은 국초에는 매우 부진한 상태에 있더니 중기 이후에 이르러 이의립의 노력과 개발로 말미암아 차차로 성하게 되었다.

공업으로는 군수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여 화포·총통을 비롯하여 조선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 중에도 태종 때에 만들어진 거북선은 뒷날 이순신의 개량 활동으로 말미암아 천하에 이름났으며 이 밖에도 임진왜란의 자극을 받아 각종 새 무기를 발명하여 제작하였다. 이장손의 비격진천뢰, 변이중의 화차가 다 유명한 것이었다.

이 밖에 도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그 중에 백자는 더욱 이름났다. 임진왜란 당시 영남 도공들이 일본에 붙들려 가서 그곳에서도 크게 성가를 올렸다.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전해 오며 조지업·칠공업·나전공업·죽세공업도 다 발달하여 일상생활에 널리 쓰이고 있다.

 [익힘]

1. 국가의 농업 정책은 어떠하였는가?

2. 대외 무역은 어떤 모양이었으며 주요 수출입품으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는가?

3. 각종 공업은 어떠한 모양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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