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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일곱째 조각 근세조선의 문화 및 사회사정은 어떠하였는가? (풍속 부면은 최근세에 미루었음)
  • ⑥ 교학은 어떻게 발전하여 왔으며 문인 학자는 어떻게 이름을 날렸는가?

⑥ 교학은 어떻게 발전하여 왔으며 문인 학자는 어떻게 이름을 날렸는가?

유학의 장려와 아울러 교육 기관의 완비 및 과거제도의 실시 등으로 말미암아 학문의 길이 크게 열려 문운이 차차로 일어났다. 그러나 연산군 이후 사화가 자주 반복되고 이어 당쟁이 계속되자 이 와중에 뛰어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산림에 숨어 학문의 진리나 연구하여 보리라 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유명한 학자가 많이 쏟아져 나왔다.

이언적·김인후·서경덕·이황·조식·이이·서기 등이 전기의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이라면 김장생·김집·송준길·송시열·허목·이재·이상정·기정진·이진상 등은 다 후기의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그 중에도 이황과 이이는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길이 후인의 존경을 받아오는 터이다.

국어학은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이 훈민정음 제정에 공로가 컸으며 최세진은 국어학에 관한 좋은 저술을 많이 남겼다.[이상 전기] 이사질·신경준·황윤석·유희·정동유·박성원 등은 후기의 이름난 국어학자로 그들이 지은 책은 지금도 국어학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국문학에는 이현보·송순·주세붕·정철·박인로·윤선도의 가사와 허균의 『홍길동전』이 드러났고 후기에는 이간·주의식·조명리·이정보의 가사와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가 다 유명하였다. 김만중의 『구운몽』,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김씨의 『의유당일기』, 그밖에 작자 미상의 『춘향전』도 또한 저명하였다.

국사학은 역대의 『국조실록』을 비롯하여 정인지의 『고려사』, 서거정의 『동국통감』, 홍여하의 『휘찬여사』, 임상덕의 『동사회강』,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전후기를 통하여 유명한 저술이며 국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한문학으로는 변계량·서거정·김종직·최립·차천로·신흠·이정귀·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 등을 비롯하여 이밖에도 허다한 대가가 있었다. 한시 방면으로는 박은·백광훈·이안눌·김창흡·이양연·신위·이상적 등을 비롯하여 그 밖에도 많은 명가가 있었다.

그리고 여류의 한문·한시·한학의 대가로는 송덕봉[유희춘의 부인]·신사임당·황진이·허난설[김성립의 부인]·강정일당[윤광연 처]·서씨 부인[홍석주의 어머니]·이사주당[유희의 어머니]이 유명하다.

그리고 조선의 정신을 찾고 조선의 사정을 알고자 하여 일어난 실지 실용의 학풍과 그에 소속한 학자들은 따로 보인 바와 같으며 그 학풍과 학자들이야말로 우리 교학사 상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던 것이었다.

불교는 국가에서 배척하였으나 근세조선 중기까지는 다소 늘고 줆이 있더니 중기 이후로는 조금도 늘어가지 않고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현상이었다. 승려들은 혹은 산성을 수축, 수비하며 혹은 왕릉을 수호하는 일에 종사하여 세도 인심과 교섭이 끊어졌다. 혹은 종이를 뜨며 혹은 누룩을 만들어 이로써 생계를 삼는 자도 있었으므로 따라서 불교 예술의 볼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 후기 승려로서 학문에 비교적 드러난 사람으로 각성·최눌·유일·혜장·의순 등이 있으며 채영은 『불조원류』를 짓고 각안은 『동사열전』을 지어 승사(僧史) 연구에 도움이 된다.】

 [익힘]

1. 교학은 무슨 까닭으로 발달하게 되었는가?

2. 국어학·국문학으로 유명한 이는 누구누구인가?

3. 국사학자로 알려진 이와 그 저술을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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