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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일곱째 조각 근세조선의 문화 및 사회사정은 어떠하였는가? (풍속 부면은 최근세에 미루었음)
  • ⑦ 미술과 공예는 어떤 모양이었던가?

⑦ 미술과 공예는 어떤 모양이었던가?

근세조선의 미술과 공예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하여 차이가 매우 컸으니 즉 전기의 여러 임금은 좋은 정치와 온갖 시설을 잘하는 동시에 안으로 신라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명의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전장(典章) 문물과 함께 여러 가지의 예술도 발달하였다.

그러다가 연산군 이후 사화가 자주 일어나고 뒤이어 당쟁이 계속하여 일어나 모든 부문에 걸쳐 적극성이 사라졌다. 더욱이 임진·병자 두 난리에 큰 상처를 입어 이미 이루어진 예술도 거의가 다 황폐해지거나 없어졌다. 청에 대한 감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아 그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후기에 가서야 그 문물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외국의 영향도 매우 적었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예술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제 전·후기의 예술을 구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기의 건축으로는 서울에 있는 경복궁·경회루[지금 것은 다 후기에 속함]·흥복사·원각사[지금은 다 없어졌음]·숭례문[지금 건물은 전기의 것]·돈화문 등이 모두 웅장하였다. 지방에도 누관·사찰 등 이 시대에 대표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으니, 안변의 가학루, 고령의 가야관, 춘천 청평사의 극락전, 해인사의 장경판고가 다 유명한 것이었다.

다음 후기의 건축으로는 경복궁·창덕궁을 비롯하여 성천의 동명관, 통도사, 석왕사, 보현사의 각 대웅전 등이 그 솜씨는 전기만 못하다 하더라도 규모가 다 장대하여 당시 사람들의 재주를 엿볼 만하다.

조각으로는 경회루 석란의 연꽃 받침과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비 귀부[덮개의 반룡도 함께] 및 13층 대리석 탑과 낙산사[양양] 7층 석탑 등은 다 전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그 중에도 13층탑은 신라나 고려에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예술품이다.

공예품으로는 흥천사 종, 보신각 종이 다 전기의 웅대하고 우수한 작품이다. 도자기는 고려 때와 비교하여 모든 점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백자만은 독특한 기술을 발휘하여 빛깔의 변화와 새김의 재미로움, 문채와 그림의 활발한 점 등이 매우 잘된 것으로서 고려의 청자와 아울러 조선 예술의 가장 우수성을 나타냈다.

그러고 글씨에는 안평대군[세종의 3남]이 국초에 제일로 치는 명필이며, 중종 때의 김구, 명종 때의 양사언, 선조 때의 한확은 다 대가로서 이를 초기의 4대가라 일컫는다. 숙종 때의 윤순, 영조 때의 이광사, 순조 때의 김정희, 고종 때의 정학교가 다 유수한 대가이다. 그 중에도 김정희는 고금의 모든 서체를 종합 연구하여 일종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추사체라 하여 매우 귀중하게 여긴다.

그림은 세종 때에 안견이 산수로서 독판쳤으며 세조 때의 최경은 인물로서 드러났고 강희안은 산수와 인물을 겸하였다. 중종 때의 이상좌는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큰 화가로서 이름났으며 신사임당[이이의 어머니]은 여자로서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더욱 초충을 잘 그렸다.

영조 때의 정선과 그의 제자 심사정은 다 산수로서 크게 날렸으며 정조 때의 김홍도는 온갖 그림에 다 능하였으며 더욱 풍속화로 이름을 날렸다. 헌종 때의 남개우는 나비를 잘 그려서 남 나비라는 이름까지 듣게 되었고 고종 때의 장승업도 또한 일세에 저명한 대가였다.

 [익힘]

1. 근세조선 예술이 전기 후기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2. 전기의 대표적 예술품으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3. 서화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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