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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덟째 가름 최근세의 나라 사정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둘째 조각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어째서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 ③ 갑신정변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③ 갑신정변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나이 젊고 팔팔한 개화당은 과단성이 풍부하여 사대당을 타도하지 않으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이에 비상한 결심을 하고 동시에 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다케조에 이치로)의 원조를 얻어 대사의 거행에 급급하였다.

고종 21년 갑신(단기 4217년, 1884년) 10월 우정국의 낙성을 기회로 삼아 국장 홍영식의 명의로 사대당의 요인을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일을 일으켰다가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개화당은 궁중으로 들어가서 고종을 경우궁에 옮겨 모셨다. 그들은 민태호·조영하·이조연 등 많은 요인을 죽였으며 개화당의 새 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원세개가 거느린 청병이 사대당을 원조하므로 이로 인해 일본군이 패하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이것이 곧 “갑신정변”이다.

난 중에 일본 공사관이 또 불태워지고 일본 거류민도 사상한 자가 있었으므로 다음 달에 일본 사신 정상형(井上馨, 이노우에 가오루)이 와서 책임을 묻자 우리나라에서는 공사관의 새 기지와 그 건축비용을 부담하고 “한성조약”을 맺었다. 이듬해에 일본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과 청나라 이홍장과의 사이에 “천진조약”이 맺어지고 청·일 양군이 조선에서 철병하며 이 뒤 조선에 무슨 사변이 있을 때는 양국이 서로 통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익힘]

1. 임오군란은 어째서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2. 개화당과 수구당은 다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겨루었는가?

3. 갑신정변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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