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마관조약에 의지하여 청국은 요동 반도를 일본에 빼앗겼는데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나서서 요동의 일본 점령은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라 간섭하여 일본은 할 수 없이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었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의 세력이 약한 줄 알고 차차로 러시아와 친해지려는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 공사 웨베르(韋貝)가 이 기회를 타서 궁중에 드나들면서 러시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친일적인 박영효 일파가 반역 혐의를 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무렵 일본 공사 정상형이 갈리고 삼포오루(三浦梧樓, 미우라 고로우)가 대신 왔다.
일본의 세력이 여지없이 몰락함을 본 삼포오루는 국면을 유리하게 돌리고자 비상 정책을 써서 고종 32년 을미년(단기 4228년, 1895년) 8월에 오랫동안 불평 중에 있던 대원군을 끌어내어 앞세우고 수비대와 부랑패를 데리고 궁중에 침입하여 무엄하게도 명성 황후를 해쳤다. 이것이 곧 “을미 8월의 사변”이다.
이어 김홍집의 친일파 내각이 다시 조직되어 또다시 정치의 개혁에 착수하여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쓰며 개국 594년(단기 4228년, 1895년) 11월 17일을 505년 1월 1일로 하였다. 종두법을 시행하고 서울 안에 소학교 네 곳을 두었으며 또 연호를 세워 이듬해로부터 건양이라 할 것을 반포하고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에 대해 백성들이 저항하자 고종은 먼저 머리털을 깎아 모범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