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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째 조각 일본은 우리나라를 어떻게 강탈하였는가?
  • ① 헤이그 밀사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① 헤이그 밀사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보호조약이 맺어진 2년 뒤에 한국 문제에 관하여 또 국제적으로 큰일이 생겼으니 헤이그 밀사 사건이 곧 그것이다. 광무 11년(단기 4240년,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기회로 우리 애국지사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인이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하여 비장한 길을 떠났다.

회의장에 나타난 그들은 보호조약이 일본의 강박에서 성립된 것이요, 우리 황제의 본의가 아니라 역설하며 황제의 친서를 제시하고 회의에 참석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의장이 한국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하였다 말하며 이를 거절하므로 이준 밀사는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다량의 피를 토하고 그 곳에서 분사하였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통감 이등박문이 군대로 황궁을 둘러싸고 강경하게 책임을 추궁하며 매국노 송병준이 이등박문에게 가담하여 무수히 강박하므로 그 해 7월에 고종이 할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가고 황태자 척(坧)이 황제 자리에 나아갔다. 이 사람이 곧 국사상 최후의 임금 순종이다.

일본은 연달아 7조의 새 조약을 맺어 법령의 제정, 관리의 임면, 일인 관리의 채용 등 모든 권리를 잡으니, 이것이 곧 “정미칠조약”이다. 이어 우리 군대를 해산시키자 이에 분노한 민중들은 도처에서 시위운동을 일으키며 매국당 일진회의 신문사를 파괴하고 매국노 이완용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일진회는 청일 전쟁 당시 조직된 정치결사로서 러일전쟁 때에는 일군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송병준·이용구 등이 그 중요 간부가 되어 열렬하게 친일을 주장하였다. 뒤에 마침내 일본의 한국 보호 정당론과 한·일 합병론을 부르짖어 매국 행동을 기탄없이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이를 몹시 나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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